본문 바로가기

μελετάω 조심하다 애쓰다 묵상하다/마가복음

(12)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막 2:23-3:6)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요 14:27a)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참 평안이라서, 세상이 주는 어떤 가치나 만족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이 평안을 얻을 때, 우리는 참으로 쉼을 얻습니다. 사람이나, 물건이나, 돈이나, 명예, 이념, 권력 등 그 어떤 것도 사람을 온전히 안식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또 놀라운 진리를 함께 알려주시는데, 이 평안이 주님의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평안은 주님께서 갖고 계신 것, 주님 안에 있는 것, 주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평안의 소유자도 주님이시고, 그것을 주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참으로 ‘평안’,..
오직 그리스도만 (막 9:5)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막 9:5) 사람은 복음과 성령의 충만한 은혜 가운데 있지 못하면 언제라도 땅의 것, 세상의 것들, 눈에 보이는 것들을 추앙하게 됩니다. 주님,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겠습니다. 원하신다면 제가 이 곳에 장막 셋을 세워 주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각각 모시겠습니다. (마 17:4, 현대인) 라고 한 것은 성령 충만한 상태에서 잘 말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렇게 단언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그 다음절에 그들의 상태가 어떠했는지 확실히 나오니까요. 누가복음에도 9:33에 나옵니다. (막 9:5) 이는 그들이 몹시 무서워하므로(ἔκφοβος)..
막 2:27-28 "하나님의 안식일" 2:27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2:28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과거 구약 시대 율법의 안식일 계명은 신약 시대의 우리에게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가르쳐 주시기 위한 모형입니다. 안식일 계명의 핵심은 일곱째 날(토요일)에 제사(예배)를 드리라는 것이 아니라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쉬라는 것이었죠.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출 20:10) 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하루라도 고단한 노동에서 벗어나서 쉴 수 있도록 해주시려는 하나님의 인애에 따른 것이라 생각될 수 있..
막 2:28 "안식일의 주님" 2:28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2:28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ὥστε κύριος ἐστιν ὁ υἱὸς τοῦ ἀνθρώπου καὶ τοῦ σαββάτου.) 위 말씀에서 '주인'은 '주님', '주'라는 뜻의 헬라어 'κύριος'/퀴리오스/란 단어로 구약의 히브리어 '주님'(אדני)/아도나이/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주인’이라 하심은 안식일의 주님이시라는 뜻이므로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스스로 하나님이심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안식일은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되었고, 하나님께서 주관하시고 복 주시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안식을 주관하고 내려주시는 창조주이시며 구원의 주님이심을 밝히셨습니다. 또 이 말씀은 우리에게 ‘쉼’, 곧 ‘구원’을 주실 수 있는 근거를 ..
막 2:23-26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2:26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바리새인들의 정죄에 대해 주님께서는 그들이 위대한 조상으로 여기는 다윗의 행동을 근거로 그들에게 변론을 하십니다. 다윗이 사울의 살해의 위협을 피해 도망하던 중에, 놉 지역에 가서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진설병을 받은 일이 기록된 삼상 21:1-6의 내용을 인용하십니다. 그 구절의 표현 그대로 차용하신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해석하신 바에 따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이것인데, 사무엘상에서는 제사장 아히멜렉이 ‘어찌하여 홀로 있고 함께 하는 자가 아무도 없느냐’고 다윗에게 묻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 시장할 때에’(2..
막 2:18-22 "새 술은 새 부대에" 2:22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 금식의 참된 의미를 비유로 가르쳐주신 뒤에, 주님께서는 왜 갑자기 생베 조각과 새 포도주와 새 가죽부대에 대해 말씀하셨을까요? 임하여 온 하나님의 나라의 질서를 가르쳐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낡은 옷에 생베 조각을 붙이는 것은 낡은 옷을 더 망가뜨려 못 쓰게 만드는 일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의 질서는 우리에게 이전에 익숙한 어떤 관습과 관행들이나, 사람의 전통에 기대는 일들과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새것이 낡은 것을 당깁니다. 그러면 낡은 것은 더욱 해어져버려 결국 뜯어지고 말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 땅 위에 임하여 온..
막 2:13-17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2:14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주님께서 레위를 부르시고 그에게 보여주신 모범, “나를 따르라”하시고 따르도록 본을 보이신 행동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이었습니다. 나를 죄인으로 여길 때,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죄인이 아니고 의인이라면, 나는 그 누구도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에게 ‘세리와 죄인들을 받아들일 마음’이 없었던 이유는, 그들이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주님을 따를 수 없었습니다. 내가 잘하고 있고, 나는 깨끗하고, 나는 올바르고, 나는 하나님 앞에서 참되다고 느끼는 것이 사실은 비참한 것입니다..
막 2:1-12 "그가 계신 곳으로" 2:5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막 2:1-12에는 공간에 대한 설명이 세 차례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첫 번째는,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1b)에서 '그가 집에 계시다'라는 말씀이 공간을 나타냅니다. 그 공간의 심상은 4절에서 발전해서 나타납니다. 4절에서 마가는 그가 계신 곳과 중풍병자가 누운 곳을 대조시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계신 곳, 하늘 성소에서 미리 택하신 우리의 구원을 위해 친히 우리가 있는 공간으로 침투하여 들어오셨습니다. 그래서 이 세계의 밖, 영원으로부터 보내지신 참 생명이 이 세계 안으로 우리 안으로 임하여 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그러한 방식으로 이 땅 위에 임하였습니다. 주님께서 계신 곳..
막 1:40-42 "원하시면 저를" 1:40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40b) ‘원하시면 하실 수 있습니다.’라는 고백은 범상치 않습니다. 나병은 주님께서 고치셨던 그 당시에도, 더 이전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셨을 때에도, 사람으로서는 고칠 수 없는 병이었습니다. 제사장은 나병이 발병하거나, 나은 것을 진단하거나, 다 나은 자가 부정했다가 정결해졌음을 공식적으로 알리는 제사를 집행하는 역할을 할 뿐이었지 그 병을 고칠 수는 없었습니다. ‘정결에 관한 규례’에 의해 스스로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외쳐야 했던 비참함. 사람들과 떨어져 고립된 채 살며, 병과 싸우며 생명을 부지해야 하는 고통. 아마도 사람이 겪는 ..
막 1:35-39 "한적한 곳으로 가사" 1:35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35a) 주님께서 새벽에 일어나셨습니다. 새벽이긴 하나 아직 어둠이 걷히지 않은 때입니다. 아침이 오는 줄을 알지만 여전히 밤이라고도 할 수 있을 정도의 새벽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렇게 이른 시각에 일어나셨다는 것은 아마도 주님께서 마음에 미리 기도를 하시기로 정하시고 밤을 보내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일찍 홀로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서 나오신 것은, 주님의 곁에 모인 자들에게서 이 기도하는 일을 방해받지 않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35b) 주님께 기도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중대한 일을 행하시기 전에 언제나 기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