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자 두 형제는 하나님 앞에 제물을 가져왔습니다.
가인(קַיִן)/카인/'소유'이 땅의 열매 가운데서 여호와께 제물을 바쳤고 아벨(הֶבֶל)/헤벨/'숨, 안개, 헛됨' 또한 자기 양 떼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바쳤습니다.
그것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제물이 드려진 것이며 그렇다는 것은 이 땅의 인류에게서 최초로 제사(예배) 의식이 행해졌음을 의미합니다.
그들의 예배 행위는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지식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자신들의 자유로운 반응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해 주신 자유 의지를 가지고 행한 것이지요.
그런 그들에게는 하나님을 말씀에 대한 지식이 분명 어느 정도는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인과 아벨이 거의 동시에 제물을 드리는 행위를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기 때문에 그 시기가 일치되었을 것입니다. 확실한 것은 성장 기간과 소출 시기가 다를 수 있는 두 산물이 동시에 하나님께 드려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아벨 그도 또한'이라는 말이 가진 동시성 때문입니다.
열매와 양의 첫 새끼들이 동시에 생긴 것이 아니라 두 형제가 동시에 함께 하나님께 제물을 가져옵니다.
만일 그 둘이 동시에 하나님 앞에 나오지 않았다면 가인은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을 주목하신 것을 알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화를 낼 일도 없게 되는 것이죠.
둘이 공교롭게 같은 시기에 산물을 얻게 되었고 이 후 하나님의 지시가 있었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지시가 있어서 둘이 제물을 드리는 시기를 조정하였든지 간에 먼저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던 것이 확실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의 순종에 대하여 사람의 자원하는 마음을 기뻐하십니다.
따라서 '아벨 그도 또한'이라는 표현은 둘의 행위 이전에 주님의 지시가 있었고 그에 대한 반응으로 두 사람이 행동했음을 강하게 암시합니다.
가인과 아벨에게 내려졌을 하나님의 말씀은 믿음과 순종을 요구했습니다. 말씀을 들은 그들의 의무는 단순히 그들의 수확물을 바치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믿음으로 드리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히 11:4a)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요일 3:12)
가인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
(유 1:11)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 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따라 멸망을 받았도다
위의 히 11:4 말씀에 따르면 가인은 믿음에 의하지 않고 제물을 드렸습니다. 하지만 아벨은 믿음으로 제물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 아벨의 제물이 가인의 제물보다 더 좋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에 의한 제물이 더 좋은 것입니다.
히 11:4은 아벨에게 믿음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동등한 제물을 드렸고 똑같이 제물을 드리는 행위를 했는데 전혀 다른 결과가 나타난 것은 오직 '참된 믿음'의 유무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거짓된 믿음도 있다는 것인데요. 참된 믿음과 거짓된 믿음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만일 아벨이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지 않고 그저 옳게 보이려고 제물을 드렸다면 하나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도 주목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믿음이란 소망의 실체이자 보이지 않는 일들의 증거이며(직, 히 11:1)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말씀에 대한 신뢰입니다.
하나님편에서는 택하신 백성들에게 주께서 정하신 때에 믿음을 허락하십니다. 반면 마귀에게 속한 자들에게는 믿음을 주시지 않으시겠지요.
그런데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아벨은 그때에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말씀을 똑같이 들었어도 가인에게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택하심의 은혜를 입은 아벨은 바른 지식을 소유하고 굳게 신뢰하게 됩니다. 반면에 그렇지 못한 가인은 말씀을 들었어도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불신하게 됩니다.
그러니 하나님 편에서는 믿음을 주시거나 안 주시거나 둘 중 하나이므로 사람에게 믿음이 있거나 아니면 없는 것이지만,
사람의 입장에선 성령을 통해 올바른 깨달음을 얻은 지식을 믿는 참된 믿음과, 잘못된 지식을 가지고 자기 생각대로 맘대로 믿는 거짓 믿음으로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똑같이 사람이 성경을 읽어도 만일 하나님을 구하지 않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믿어 버린다면 거짓된 믿음을 갖게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성경 본문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백성에게 순종을 바라시고 그들을 말씀을 통한 구원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말씀에 대해 모든 사람은 자유 의지를 가지고 반응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하여 스스로의 의지와 바람대로 행동하는 반응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람의 자유 의지에 따른 행동은 심판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을 행한 사람을 영생으로 악을 행한 자는 멸망으로 심판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의 선행이 아니라 믿음 때문에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위에서 설명한 대로 사람의 행위가 선한지 악한지를 구분하는 기준은 그 행위 안에 믿음이 있는지의 여부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과 인간적인 생각의 결정적인 차이점입니다. 이 차이를 줄이는 방법은 스스로 믿음과 행위를 분리하지 않도록 말씀 묵상과 기도에 최선을 다하는 길 뿐입니다.
아벨의 믿음 안에는 하나님의 만물을 다스리시는 주권과, 무한하신 능력과, 절대적인 선하심을 아는 지식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을 선하신 분으로 올바르게 알지 못했다면 하나님께서 부모와 뱀에게 내리신 저주에 관해 들었을 때 절망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자신은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기 전에 태어나면서부터 그 저주 아래 놓이게 된 것이니까요.
그러니 아벨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었을 것입니다. 분명 주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도록 죽음과 질고를 내리신데 그치지 않으시고 믿는 자에게는 모든 저주를 뛰어넘는 생명의 은혜를 내려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믿음을 가진 아벨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속이는 형제의 말을 듣고 아무 것도 없는 들판으로 가서 죄 없이 맞아 죽었습니다.
(직, 창 4:8)
가인은 자기 형제 아벨에게 말하였다. (우리 들로 나가자.)
그들이 들에 있을 때 가인이 자기 형제 아벨을 대적하여 일어나 그를 쳐 죽였다.
혹 그가 범죄로 인해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해서 죽은 게 아닌가 생각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신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목자였습니다.
그들이 들에 있을 때 가인이 대적하여 일어나 그를 죽였지요.
그날의 가인처럼 이 시대에도 마귀에게서 나온 자들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적대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언제나 그들은 형제처럼 말합니다. "우리 들로 나가자." 그리고는 결국 쳐 죽입니다. 주께서 멸망시키실 때까지 그런 짓을 계속할 것입니다.
아벨은 처음부터 하나님께 선택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창세 전에 아벨을 구원하시기 위해 택하셨으나 가인은 구원하지 않으시기로 정하시고,
아벨을 그리스도의 예표로 삼으시고 가인은 모든 불신자의 조상이 되게 하시고,
아벨과 그의 제물을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을 받으시지 않으신 그 모든 일은,
하나님의 예정하심과 인간의 행위에 대한 심판이 각각을 침해하지 않고 함께 작동하는 놀라운 실례입니다.
'아벨'(הֶבֶל)이라는 이름은 '허무, 헛됨'이라는 뜻이지만 동시에 '숨, 호흡'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인 '가인'(קַיִן)의 뜻은 '소유'였죠. 그를 자기 것으로 생각했던 마음이 헛된 것이었음을 깨달은 부모의 마음이 담기지 않았을까요?
아니면 그 헛됨은 땅의 소유에 대한 생각일지도 모릅니다. 혹은 영원히 살 수 있었던 그들이 반드시 죽게 되었기에 살면서 느꼈을 지독한 감정일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선하신 하나님께는 이미 계획이 있으셨습니다.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숨을 통해 사람을 생명체로 만드셨듯이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통해 생명을 얻도록 하실 것이었습니다.
그 인류 구원의 계획을 따라 아벨을 경이로운 능력을 가진 그 참 생명을 가리키는 상징적인 인물로 삼으셨습니다. 자신의 숨을 끊으심으로써 모든 백성들을 살리시기 위해서..
그리하여 하나님의 '숨', 아벨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참 자기 이름처럼 허무하고 헛된 죽음인 줄로만 알았는데.. 지금 우리 모두는 그의 죽음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있지 않습니까?
이와 같이 영원한 교회를 다시 일으키시고 하나하나 말씀을 통해 건져 주시는 분이 바로 절대적으로 선하신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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