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μελετάω 조심하다 애쓰다 묵상하다/시편Ⅰ

#6 회개의 모범

주님, 분노하며 나를 책망하지 마십시오. 진노하며 나를 꾸짖지 마십시오. (시 6:1, 새번역)

이 책망과 진노는 정의로우신 주 하나님께서 악인에게 내리시는 영원한 벌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하는 일이 없사오니 스올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5)

 

분명 다윗은 자신의 악행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분노와 진노하심으로 내려질 형벌을 면하길 원했습니다. 

그러나 성도의 범죄에 대한 사랑의 징계마저도 피하고자 했던 것은 아닙니다. 

죗값으로 오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 바로 '회개'의 심령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 시에서 자신의 죄악을 많은 눈물로 통회하고 있습니다(6-7).

아마도 그때 압살롬의 반역이나 그것과 비견될 만한 상황에 놓임으로써 고통을 받고 있었을 것입니다. 

 

다윗은 어려서부터 순종의 용사였습니다.

아버지 이새의 명으로 양 떼를 지키는 자로서 살았습니다.

곰과 사자의 입을 찢고 양 떼를 구하려 목숨을 걸었지요.

하나님 앞에서도 그러했습니다. 찬송과 기도와 말씀 묵상하기를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다윗이 큰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죄악을 범하였으니 의로우신 주 하나님께서 정의의 징계를 내리십니다.

그래서 가족들도 고통을 받고 자신 또한 예루살렘 밖으로 도망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 시므이에게 큰 저주의 말을 듣게 됩니다.

피 흘린 자여 사악한(벨리알에게 속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삼하 16:7b)

 

그때 아비새가 충성된 반응을 보였으나 다윗은 그를 뿌리치며 저주하는 시므이를 막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다. (삼하 16:10b) 

 

왜 그랬을까요?

다윗은 자격도 없는 자가 자기를 저주하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듣고도 거기에서 주의 말씀을 알아챘던 것입니다.

곤란한 상황 속에서도 자신에게 향하신 주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는 영적 민감성이 다윗에게 있었으니,

그것은 그날에 주의 말씀에 가까이 있도록 성령 하나님께서 그를 인도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다윗은 사울이 실패한 그곳에서 왕의 대표성을 지닌 채 하나님의 백성다움을 이스라엘에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 (삼하 16:11b) 

 

'내가 저주 받겠다.' 이것이 다윗이 이때 보여준 순종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다 받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저주도 징계도 받는 순종.

피하기 위해서 악착같이 몸부림치지 않고,

'제가 받겠습니다. 저는 받아 마땅한 자입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의만 드러나길 원합니다. 주님의 공평하심과 정직하심이 이 땅에 세워지게 하여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도 그러셨습니다. 저주의 나무 위에서 다 받으셨습니다.

아무 저항 없이 저주의 형벌을 다 받는 그 길을 가셨습니다.

다윗과 주님의 큰 차이점은

처음부터 다윗은 자기 죄악 때문에 마땅한 저주를 받았었지만 끝끝내는 저주했던 시므이를 쳐 죽였고(왕상 2:46),

주님께서는 처음부터 우리 죄악 때문에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저주와 형벌을 끝까지 대신해서 받으신 데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윗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약 2:8) 

자신의 죄로 인한 사랑의 징계는 성도로서 마땅히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내가 원인을 제공하지 않은 재앙과 저주에 대해서도 교회라는 이름에 걸맞게, 예수님의 몸 된 자격으로,

'저에게 벌을 내리십시오. 주님, 제발 그들을 용서해주시고 대신 제게 징계를 내려 주십시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도고이며, 믿음의 회개이고, 원수를 사랑하라 하신 계명에 대한 순종입니다.

진정 예수님을 좇는 교회라면 이러한 영적 판단과 사랑을 나타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게 근심하는 경건한 슬픔은 회개를 가져오고,

회개는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기 때문에, 그런 슬픔은 후회할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세상적인 근심은 죽음을 가져올 뿐입니다.

<고후 7:10, 쉬운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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