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담 ‘아담, 사람, 인류’ 하와 ‘살다, 생명을 가지다, 생명’
2 가인 ‘소유하다, 얻다’ 아벨 ‘숨, 허무, 헛됨’ 셋 ‘놓인, 놓임’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창 4:25b)
3 에노스 ‘사람, 인간’ -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 4:26b)
4 게난 ‘소유자, 소유’
5 마할랄렐 ‘하나님께 찬양’
6 야렛 ‘내려옴, 하강, 가계, 후손’
7 에녹 ‘전수자, 전도자’
8 므두셀라 ‘창 던지는 자, 보냄, 그가 죽을 때에 그것을 보내리라’
9 라멕 ‘강한 자’
10 노아 ‘안식, 쉼, 안식하게 하다, 위안’
>>> 숨(아벨)을 불어넣으셔서 하나님의 소유가 된(가인) 사람이(아담) 생명을(하와) 얻으니(가인) 하나님께 찬양하라(마할랄렐). 주께서 아래로 내려오셔서(야렛) 길을 가르치시고(חֲנוֹךְ)/에녹/, 그가 죽을 때에 그 영을 보내시니(므두셀라) 강한 분이(라멕) 우리를 안식하게 하신다(노아).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네요.
그런데 여기서 오늘 저와 함께 주목할 부분은 가인과 라멕입니다. 각각 ‘소유하다, 얻다’라는 뜻과 ‘강한 자’라는 뜻의 이름입니다. 그들은 형제를 죽였고, 많은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가인과 라멕의 행위를 성경에 자세히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저 우리는 그들처럼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는 그런 상식에서 끝나는 건/ 성경의 메시지를 너무 단순화시키는 것입니다. 거의 믿음이 없는 수준으로 낮추는 것이지요.
그들의 행위를 기록하신 가장 큰 이유는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기 때문이니, 이는 곧 그리스도를 알리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시어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셨습니다(창 4:15).
분명 가인은 하나님의 계명과 법도를 어긴 죄인이지만, 아무리 많은 사람이 에워싸도 그는 죽임을 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벨이 죽었고, 사람(아담)에게 아들을 보내주셔서 믿는 자들의 대를 이으셨고,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 4:26)고 되어 있습니다.
아벨(숨)은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 그대로 그리스도께서 숨을 거두시고, 성령님을 보내주셔서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하게 된 것입니다.
그때 사람들이 뭘 한 것입니까? 각 언어로 기도했죠. 기도는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합니다. 바로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이렇게 구약 성경의 말씀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면 이제 성경 창세기 4장에 기록된 라멕의 행위를 살펴보겠습니다.
23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24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중요한 것은 사람의 행위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비밀한 뜻이 무엇인지를 묵상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상처받은 어린 양이 보이십니까? 아무 죄 없는 아들 잃은 아버지의 진노가 느껴지십니까?
아버지께서 아들의 창상을 인하여 이에 연루된 모든 죄인의 사망을 선포하십니다.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저주는 너무나도 정당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에서 사람에게 상처입히고 죽인 자의 벌이 무엇입니까? 사망입니다. 하나님께서 쏘신 진노의 화살을 맞고서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죠.
그런데 어린 양은 죄가 전혀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죄 없는 신을 죽이는 자는 그 형벌이 죄 많은 사람의 경우보다 훨씬 더 클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을 상해한 자에 대한 너무나도 당연한 형벌이죠.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을 부르시며 소리를 듣게 하십니다. 내 백성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아버지와 아들의 영에 상처를 입힌 자들을 향하여 진노의 형벌을 내리십니다. 말씀에 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히 10:29)
그 벌이 칠십칠 배입니다. 완전하고 영원한 고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아담의 칠대 손 에녹도 이들에 대해 예언하여 말하기를,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하지 않은 자가 경건하지 않게 행한 모든 경건하지 않은 일과/ 또 경건하지 않은 죄인들이 주를 거슬러 한 모든 완악한 말로 말미암아/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유 1:14-15) 하였습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동행하신 에녹은,
하나님께서 취하셔서 세상에서 하늘로 들어 올려졌습니다.
그리고 이제 오늘 시편 말씀을 묵상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비밀한 뜻과 행하심에 시선을 두고,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생각합니다.
하나님이여 이방 나라들이
주의 기업의 땅에 들어와서 주의 성전을 더럽히고 예루살렘이 돌무더기가 되게 하였나이다
그들이 주의 종들의 시체를 공중의 새에게 밥으로,
주의 성도들의 육체(성전)를 땅의 짐승에게 주며
그들의 피를 예루살렘 사방에 물 같이 흘렸으나 그들을 매장하는 자가 없었나이다
우리는 우리 이웃에게 비방 거리가 되며
우리를 에워싼 자에게 조소와 조롱 거리가 되었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영원히 노하시리이까 주의 질투가 불붙듯 하시리이까
주를 알지 아니하는 민족들과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는 나라들에게
주의 노를 쏟으소서
그들이 야곱을 삼키고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함이니이다
우리 조상들의 죄악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긍휼로 우리를 속히 영접하소서 우리가 매우 가련하게 되었나이다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를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
이방 나라들이 어찌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말하나이까
주의 종들이 피 흘림에 대한 복수를 우리의 목전에서 이방 나라에게 보여 주소서
갇힌 자의 탄식을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며
죽이기로 정해진 자도 주의 크신 능력을 따라 보존하소서
주여 우리 이웃이 주를 비방한 그 비방을 그들의 품에 칠 배나 갚으소서
우리는 주의 백성이요 주의 목장의 양이니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대대에 전하리이다
저희들을 괴롭히는 고통에 대한 복수를 저희 눈앞에서 믿음 없는 자들에게 보여 주십시오. (10)
어서 응답하셔서 주를 비방하는 자들에게 일곱 배로 갚아주십시오. (12)
주의 성전인 우리가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 주의 영광을 대대로 전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13)
우리 조상들의 죄악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긍휼로(רַחַם)/라함/‘불쌍히 여김, 동정, 자비’ 우리를 속히 영접하소서 우리가 매우 가련하게 되었나이다 (8)
왜 하나님께 긍휼을 구하는가?
하나님께서 하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뜻과 계획대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전을 부수셨고...
보라 내가 북쪽 모든 종족과 내 종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을 불러다가 이 땅과 그 주민과 사방 모든 나라를 쳐서 진멸하여 그들을 놀램과 비웃음 거리가 되게 하며 땅으로 영원한 폐허가 되게 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 25:9)
하나님! 하나님은 스스로 구원자라 하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우리를 구원하지 않으십니까?
주의 이름이 그리스도시면 최소한 그 이름의 영광을 위해서라도 우릴 구원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게 아닙니까?
공의와 정의대로 믿음 없는 자들에게 벌을 내리셔야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신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우리의 부르짖음을 들으신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러나 지금 우리 모습을 보십시오. 하나님께 버려진 것이 확실합니다.
형통하기는커녕 하나님은 우리를 더욱 쇠하여지도록 방치하고 계십니다.
날마다 눈물로 부르짖으나 듣고 계시지 않는 것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이렇게 저희를 버리십니까?
하나님의 계획은 참 이스라엘을 이런 상태로 놓아두시는 것입니까?
그럼으로써만 하나님의 백성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할 수 있는 힘을 얻어 그분의 죽으심 안에서 다시 일으켜질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벧전 4:13)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고후 1:5)
또한, 그럼으로써만 그리스도를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빌 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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