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μελετάω 조심하다 애쓰다 묵상하다/시편Ⅲ

#78 교훈

1 내 백성이여, 내 율법(תּוֹרָה)/토라/‘율법, 가르침, 교훈을 들으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주님께서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2:7)

하신 말씀과 같은 의미입니다.

 

2절을 보면, 마치 예수님께서 비유로 제자들을 가르치셨듯이

2 내가 입을 열어 비유(חִידָה)/히다/‘은밀한 말, 비밀의 말로 말하며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을 드러내려 하니

 

3 이는 우리가 들어서 아는 바요 우리의 조상들이 우리에게 전한 바라

4 우리가 이를 그들의 자손에게 숨기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영예와 그의 능력과 그가 행하신 기이한 사적을 후대에 전하리로다

5 여호와께서 증거를 야곱에게 세우시며 법도(תּוֹרָה)/토라/‘율법, 가르침, 교훈를 이스라엘에게 정하시고 우리 조상들에게 명령하사 그들의 자손에게 알리라 하셨으니

6 이는 그들로 후대 곧 태어날 자손에게 이를 알게 하고 그들은 일어나 그들의 자손에게 일러서

7 그들로 그들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며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잊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계명을 지켜서

8 그들의 조상들 곧 완고하고 패역하여 그들의 마음이 정직하지 못하며 그 심령이 하나님께 충성하지 아니하는 세대와 같이 되지 아니하게 하려 하심이로다

 

참으로 교회는 다음 세대를 위해 오직 하나님께서 세우신 증거를 알리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하지만 정말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로 행했지요. 그들의 심령은 하나님께 충성하지 않았고, 시시때때로 하나님께로부터 도망치고 맙니다. 먼 과거에도, 가까운 과거에도 그랬고, 또 그래선 안 되겠지만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제로 교회는 7절 말씀과 같이 소망을 하나님께 두고 하나님께서 우리 역사 가운데 말씀하시고 행하신 일들을 자녀들에게 설명해야 하는 임무를 맡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당과 비슷하게 지은 건물과 성당처럼 꾸며진 화려한 색감의 스테인드 글라스 유리창을 매주 보게 하는 것으로, 그리고 평상시에는 언제든 신속하게 주님께로부터 도망치는 모습을 보이는 것으로 자녀들이 신앙을 배우게 해왔던 것입니다.

오늘은 성경을 통해 이 문제점에 대해 생각해보고 그 해결책을 찾기 원합니다.

인류의 역사는 곧 구원의 역사이며, 그것은 사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계시하신 역사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뭐냐면, 인류 역사의 모든 세대에 계시하시려는 목적 자체에서 이미, 컴퓨터로 예를 들어 말씀드리면, 그 용량이 이미지 파일이든 오디오나 동영상 파일 용량이 다 안 담기는 거예요. 지극히 크기 때문에 구현할 수가 없어요. 그런 큰 용량을 pc에 담아서 보여주려면 벌써 압축이 들어가게 되고 원본 데이터에 손상이 발생하겠죠? 그래서 이 제한적인 세상에 어떻게 자신을 압축하여 보여줄까를 생각하시는 지혜 가운데서 성육신과 구원 역사가 결정되었습니다.

모든 계시의 역사가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설계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어디에서 손실이나 왜곡이 생길 것을 다 알고 계시죠? 그리고 그것을 최소화시키는 방법이 바로 성경의 기록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성경을 보게 하신 건데, 안타까운 것은 성경에 나타내신 하나님의 모습(뜻과 행하심)을 이해하려 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이용할 수 있는지에 관한 기준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성경의 내용, 즉 성부 성자 성령의 유일하신 하나님을 그렇게 바라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설명하고 이해하는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인지 한계를 아시고 쓰신 성경 말씀과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최대한 왜곡 없이 성경을 기록하셨지만, 사람들이 그 기록을 가지고 왜곡시킨다는 것입니다. 자기중심, 인간 중심으로. 끔찍한 비극이죠. 그래서 설명하는 게 원본하고는 전혀 다른 내용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을 하나님의 형상을 내가 인지하기 쉽도록 비상구나 화장실 문에 붙어있는 표지 같은 방식으로 낮춰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말이 너무 단순해져서 하나님을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시는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지, 사람의 복지가 최우선이 아니라는 점은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아는 일에 매우 중요합니다. 그 일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니까요.

하나님의 어떠하심은 오로지 성경에 드러난 구속사 안에서만 설명이 가능합니다. ‘성경의 내용 자체가 하나님을 나타내고 있다. 그 처음부터 끝까지 알파와 오메가는 오직 하나님이시다. 성경의 기록 자체가 하나님을 최소한의 손실로 드러내신 방법이고, 따라서 인간이 임의로 성경을 더이상 압축하면 왜곡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 전체가 하나님을 그리고 있다는 사실은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시고, 우리는 수용하고.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자기들의 복락을 위해 성경을 유치한 아이콘처럼 왜곡해서 설명하게 되는데요.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남녀 화장실 나눠서 들어가는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것입니다. 성경의 메시지를. 그게 뭐냐? 바로 율법주의가 그렇게 생긴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생략하고, 너희 이렇게 하면 천국 간다. 이렇게 안 하면 지옥 간다. 그러고 마는 거예요. 그러나 그렇게 해서 천국 갈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다 같이 스올 구덩이에 빠져버릴 뿐이에요.

하나님께서는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만일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13:23)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악에 익숙한 너희는 다른 누가 아니라 바로 접니다. 또한, 모든 사람입니다. 이미 부패한 인간이기에 선을 행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십니다.

사람이 스스로 기준을 정해서 죄가 없다고 우긴다고 죄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판정하는 기준은 하나님의 율법입니다.

그러나 만물보다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17:9)

제 마음은 만물보다 심히 악하며 썩고 병들었기 때문에 또 율법의 뜻(그리스도)에 반하는 죄를 범하게 됩니다. 그 결과로 비참 속에서 고통을 당하며 신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게 슬픔이 있고, 이 땅에 환난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친히 예수님께서 이 죄(비참)과 고통과 사망에서 저와 여러분을 건져주시려고 저주의 나무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늘에 오르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죄를 사하시는 예수님의 행하심에 대한 공로를 의지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은 놀랍게도 오직 은혜로(값없이) 주십니다. 따라서 이미 본성상 죄인인 우리에게/ 구함을 받는 조건으로/ 어떤 선한 행위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나무에 달리심으로써, 율법의 요구를 온전히 이루심으로써 이미 우리 죗값을 다 갚아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말로 예수님을 믿으면 벌써 하나님의 자녀인 게 확실하기 때문에, 설령 잠시 동안은 여러 죄와 죄들에 빠지고, 또 그로 인한 여러 가지 고통을 받게 되더라도, 결국에는 반드시 건짐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진정 행복하고, 오직 예수님만이 살아서나 죽어서나 우리의 유일한 위로가 되십니다. 오늘 이 위로과 안식을 우리 모두에게 주심을 굳게 믿고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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