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μελετάω 조심하다 애쓰다 묵상하다/시편Ⅲ

#76 하나님의 전쟁

1 하나님은 유다에 알려지셨으며 그의 이름이 이스라엘에 크시도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지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리셨기 때문입니다.

유다와 이스라엘 가운데 하나님께서 알린 바 되셨다는 것과/ 그를 알리신 곳에 그 이름이 크시리라는 것은, 우리에게 아주 큰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알게 하시기를 기뻐하실 때 자신을 알리십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 주시는 교회들은 행복할 것입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한 백성들이 행복하고, 그 지식으로 마음을 채운 성도가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2 그의 장막은 살렘에 있음이여 그의 처소는 시온에 있도다

여기서 장막과 처소는 성전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신 장소를 가리키는 말이죠, 결국 그리스도의 몸, 곧 교회입니다. 그런데 특별히 장막이라 하셔서 이동 가능함을 상기시키십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성전은 움직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시고 또 우리가 살아 있으니까요.

이제 그 성전이 살렘과 시온에 있다는 말씀은 스가랴 8:3 말씀이 떠오르게 합니다.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시온에 돌아와 예루살렘 가운데에 거하리니/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이라 일컫겠고/ 만군의 여호와의 산은 성산이라 일컫게 되리라

시온과 예루살렘은 성전이 있는 하늘의 거룩한 산과, 그리고 그 하늘을 품은 마음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계신 장소인 그곳은 하늘 거룩한 산에 자리한/ 진리의 성읍이며, 동시에 그렇게 불려지게 될 우리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우리에게, 우리 마음에 특별히 임재하시는 일을 기뻐하십니다(2).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셔서 온 교회에 알려지셨고, 그로 인해 교회 곧 우리들에게서, 우리들의 마음속으로부터 그리스도의 이름은 위대하게 여겨지고 있습니다.

 

3 거기에서 그가 화살과 방패와 칼과 전쟁을 없이하셨도다

이 말씀의 구체적인 예를 구약 성경에서 찾아보면 역대하 20장에

5절에서 왕 여호사밧이 여호와의 전 새 뜰 앞에서 유다와 예루살렘의 회중 가운데 서서/ 있을 때,

지금은 없지만/ 구약시대에는 건축물로 형상화된 하나님의 전이 존재했습니다. 지금은 없습니다. 그때 유다 네 번째 왕 여호사밧이 거기 수많은 회중 앞에 서 있었고, 자신이 아는 역사를 바탕으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살던 주민을 쫓아내시고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영원히 주지 아니하셨습니까?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이 땅에 살면서 주의 이름을 위하여 한 성소를 주를 위해 건축하고 이르기를 만일 재앙이나 난리나 견책이나 전염병이나 기근이 우리에게 임하면 주의 이름이 이 성전에 있으니 우리가 이 성전 앞과 주 앞에 서서 이 환난 가운데에서 주께 부르짖은즉 들으시고 구원하시리라 하였나이다... 우리 하나님이여 그들을 징벌하지 아니하십니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하고...”

유명한 기도지요?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이므로 왕은 성전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인 것은 몰랐지만, 그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 합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주의 백성이 악의 세력을 대적할 방법을/ 자신들에게서 찾지 않고 오직 주만 바라보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왕의 기도에 응답하실 때 진리를 잘 모르고 기도한 왕에게 직접 하지 않으시고 교회 중에 한 사람에게 임하여 말씀하십니다.

 

(회중, 즉 모인 사람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아니 그보다 훨씬 오래전 광야에서도, 심지어 아담의 가정에서도 언제나 교회였습니다. 원래 교회라는 낱말의 뜻은 세상 밖으로 불러 내어진 사람들이라 신약시대에 와서 처음 교회가 생긴 것이 아닙니다. 구약 교회와 신약 교회의 차이점은 단 하나죠. 지식의 차이입니다.

그리스도를 여호사밧 왕처럼 모르거나 우리처럼 알거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차이, 곧 믿음의 차이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하시니 (눅 7:28)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차이 때문에/ 구약 교회들보다 세례자 요한이 크고, 그보다도 더욱 우리들에게 은혜가 크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에 응답하실 때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여 성전의 의미를 모르고 기도한 왕에게 하지 않으시고 교회 중에 한 사람에게 임하여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왕이 기도한 그때 대하 20:14 여호와의 영이 회중 가운데에서 레위 사람 야하시엘에게 임하셨으니

레위 사람도 부르심 받은 백성을 가리키죠. 그리고 그가 말씀을 전합니다. 대하 20:17,

17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대열을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 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내일 그들을 맞서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매

당시 그곳은 성전이었지만, 동시에 화살과 방패와 칼이 난무하는 전쟁터였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어떻습니까? 그것이 가리키는 바대로 우리(교회)는 전쟁터입니다.

다만 총칼의 전쟁이 아닌 교리의 전쟁입니다.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는 인본주의, 사람 중심, 행위 중심, 율법주의, 기복주의 등등 수많은 거짓된 교리들을 전쟁 무기로 삼아 교회들을 점령하여 다스리려 합니다. 어찌할 바 모르는 우리는 오직 주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한편, 우리 마음 또한 성전인 동시에 전쟁터입니다... (중략)... 그런데 오늘 이 전쟁터에서,

시편 말씀에 3, 거기에서/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화살과 방패와 칼을 부수셨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너희와 함께 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지금도 마음속에 전쟁터인 분들이 있겠지요. 이제 그것을 멈추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제게는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을 만한 방법이 전혀 없습니다. 성경은 오직 주님만이 길이심을 알려주십니다. 승리는 제가 아니라 오직 주님께 있습니다. (셀라)

 

4 주는 약탈한 산에서 영화로우시며 존귀하시도다/라고 된 이 구절은 의역된 것인데,

원어 번역은 주님께서 빛나시니 식물(먹을 것)이 많은 산보다 위대하십니다입니다.

산은 먹을 게 많죠. 옛적부터 산 하나가 있으면 많은 백성과 동물들에게 먹을 것을 제공하게 됩니다. 산은 귀하죠. 그러나 분명 주님께서는 그보다 훨씬 더 크고 존귀하신 분입니다/라는 뜻이 시적으로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위대하고 존귀하신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모신 사람들, 곧 하나님께서 자신의 유업으로 선택하신 백성은 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복을 감히 어느 누가 건드릴 수 있겠습니까? 그 누가 하나님의 뜻을 취소시킬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일은 세상 그 누구도 그 효력이 다하게 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심령이 되어 오직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생각이 대대에 이를 것이다. 영원히 서 있을 것이다/라는 확신을 가질 것입니다(시 33:11).

하나님의 계획과 생각이/ 어떻게 우리들의 역사 속에 펼쳐질 것인지 기대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 처할지라도 찬송을 부르며 주의 성전을 새롭게 하실 주의 일들을 기대하는 우리는 오직 주님만 바라봅니다.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시 3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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