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43편은 42편과 후렴구가 동일하고 따로 표제가 없어 원래는 하나의 시였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이 시편을 보관한 악사들이 어떤 편의를 위해 이것을 따로 구분한 듯합니다(박윤선).
표제에 "고라 자손의 마스길(מַשְׂכִּיל)'묵상시, 교훈시'"이라고 했는데, 이는 다윗이 지은 시를 고라의 자손들이 맡아 보관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칼빈).
레위의 증손이었던 고라는 아시다시피 하나님께 반역했던 무리의 대표였으나 그 아들들은 멸절되지 않았었습니다(민 26:11).
그리고 훗날에는 그 후손들이 레위인들이므로 찬송의 제사에 관련된 임무로써 시편을 보관해두는 일도 맡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시편 중에는 '다윗의 시'라는 표제가 없어도 사실은 다윗이 쓴 시들이 있습니다. 칼빈은 이 시 42편에 대해서, 그 내용으로 보아 다윗이 사울의 핍박을 받아 망명 생활을 했던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측된다고 했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마 5:6)
이와 같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모습을 오늘 다윗이 보여줍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합니다.”(1)
영적인 기갈에 처한 상황에서도 마르지 않고 흐르는 물을 찾습니다.
생명의 원천이 오직 주님께만 있는 줄을 알기에 그렇게 갈급하게 주님을 찾았습니다.
이렇게 주를 갈급히 찾는 그 자체가 벌써 은혜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오직 은혜로만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썩어질 것들만 찾고 구하다가 정작 구원을 주실 하나님을 찾을 생각은 하지 못하고 맙니다.
참 생명이신 주님께서 주님을 찾는 이들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찾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요 6:33)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계 21:6b-7)
다윗은 밤낮으로 슬피 울었습니다(3b). 그것은 단순히 자기의 고생 때문이 아니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멸시하여 조롱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3a)
그게 가장 슬픈 일이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모든 사람은 죄악 중에서 출생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를 않습니다.
어려서부터 다윗은 순종의 용사였습니다. 아버지인 이새의 명에 따라 양 떼를 지키는 자로서 목숨을 걸고 곰과 사자에 맞섰죠.
하나님 앞에서도 그러했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다윗은 사울의 핍박을 피해 예루살렘 밖으로 도망합니다.
타지에서 떠도는 신세가 된 그는 예전에 왕성했던 신앙생활을 떠올리며 그때와 같지 못한 지금의 처지에 낙심이 되었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5)
자기의 영혼이 낙심하고 있음을 느끼고 어째서 그러느냐고 반문합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하나님께 은혜로 받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의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그러지 말고 너에게 있는 믿음대로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할 것이다.'
자기 마음을 자기 자신과 떼어놓고 보는 것입니다. 믿음대로 생각하고, 믿음대로 살지 못하는 것이 감각에 의존하는 마음 때문임을 알았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런 언급을 한 적이 있죠?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 7:20)
그럼 우리는 무엇이 잘못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살면서 실수와 악행으로 인해 실망하고 낙심하기가 쉬운데, 그게 잘못입니다.
주님을 중심으로 하는 일은 주님께서 축복하시기 때문에 반드시 결실을 맺을 것으로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결과물이 없다고 낙심하는 것은 주님 밖에 다른 것을 더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20년을 외쳤어도 회개하는 자 하나 없었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전도한 노아도 있습니다.
또 그렇게 다윗도 낙심된 중에도 아주 절망하지는 않고서 신앙을 지켜낼 수가 있었습니다.
진정한 신자는 그럴 때 내 힘으로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하나님께 전부를 맡기는 그런 신뢰의 기회로 삼게 됩니다.
그 때는 소망이 끊어진 때가 아니고, 오히려 소망을 얻는 때입니다.
신자는 설령 받은 은혜를 잃었어도, 간절히 사모하면, 다시 새 은혜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은혜에서 떨어진 그것이 더 귀하고 좋은 은혜에 들어가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목마른 사슴처럼 갈급한 심령이 되어 주를 찾는 그 은혜가 오늘 우리에게도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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