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셀라)
(셀라) 하고 쉽니다. 멈춥니다. 육신의 창을 닫고, 이제 영혼의 눈을 하늘로 향합니다. 말씀을 묵상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이 사라지고, 눈에 보이지 않는 본질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주님께서는 하늘의 지혜를 허락하시고 깨달음을 주십니다.
그때 성령 하나님께서 마음에 이런 생각을 부어 주셨습니다.
하늘에 한 시내가 나뉘어 흐르더니 하나님의 성, 곧 성소가 기쁘게 됩니다(4).
하나님께서 계신 그 성이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 하늘의 일이 이 땅 위에서도 이루어지는데, 그것은 장소에서가 아니고 사람에게입니다.
하늘의 하나님의 나라가 땅의 성도에게 임하였으므로, 교회인 '우리'가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하나님의 성이요, 성소는 눈에 보이는 장소가 아니라 오로지 성도와 성도의 공동체인 교회뿐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하심이 시냇물이 나뉘어 흐르듯 나누어져서 많은 사람에게 전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은혜를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독차지하기를 바라고 기뻐할 일이 아니고
남에게 주기를 좋아하는 것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혜와 겸손과 더 많은 은혜가 있을 것입니다.
'새벽'(5b)은 이제 흑암의 어두움을 밀어내는 빛이 나타날 새벽이니, 그 도우시는 광선이 우리를 비춥니다.
온갖 억울하고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이 성으로 밀려오며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하나님께서 이 성 중에 계시므로(5a) 신속하게 도움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께서 함께해주시기만을 기도하게 되고, 흔들리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5b).
하지만 뭇(많은) 왕국들은 떠들어 대니(6a), 세상 불의한 세력들이 요란하게 힘을 과시하나 그들의 권세는 쉽게 흔들리고 요동을 치게 됩니다.
반면에 전능하신 주 하나님께서 소리를 내시면 별들이 움직이고 땅이 녹아버리지만(6b) 그 소리는 고요합니다.
참으로 언어가 없고 말이 없으며 음성이 들리지도 않지만,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지고 그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시 19:3-4a).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7, 11)
주께서는 군대들의 주이시며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모든 세력을 이기시고, 권세를 잡으십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야곱의 하나님(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이스라엘'로 개명해 주셨는데, 이스라엘(יִשְׂרָאֵל)은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라는 뜻입니다.
야곱(יַעֲקֹב)'발꿈치를 잡은 자, 속이는 자, 대신들어 앉은 자(찬탈자)'은 ‘발뒤꿈치를 잡는 자’라는 뜻이었죠.
발뒤꿈치 잡고 빼앗는 것은 뱀의 후손이 하는 일입니다. 사탄이 그리스도의 몸을 해하려고 발꿈치를 상하게 합니다.
거듭나는 은혜를 받기 전에 야곱은 이전의 우리와 똑같이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하던 자였습니다.
그랬던 그를 거듭나게 하셔서 하나님께서 주도하시고 다스리시는 참된 교회의 회원으로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원죄를 가진 채 영문도 모르고 사탄의 왕국 백성으로 태어납니다. 그리고 죄악된 세상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죠.
그러나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택하신 백성들만이 부르심의 은혜에 순종합니다.
그들은 이제 노예 생활을 탈출하고서 광야로 가게 됩니다. 하지만 광야 생활도 녹록하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그들이 복음을 깨닫지 못하여 옛적의 사고방식을 그대로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부족해서입니다.
그 첫 세대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영혼마저도 낙원에 이르지 못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 중에 모세도 가나안 땅에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지금도 그의 영혼은 하늘에서 영생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실 하나님께서 주시기로 약속하신 가나안 땅도 모형일 뿐입니다. 진짜는 눈에 보이는 그 장소가 아닙니다.
실제로 그 땅에 들어간 출애굽 2세대 백성들이 정말로 풍족한 삶을 누렸습니까?
아닙니다. 전쟁은 간헐적으로 계속되었고, 시간이 갈수록 죄악이 발전했고, 점점 더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백성의 삶은 더욱 피폐해져 갔으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어두워져만 갔습니다.
“와서 여호와의 행적을 볼지어다. 그가 땅을 황무지로 만드셨도다.”(8)
‘아골 골짜기’(수 7)를 아시지요? 저주와 심판과 멸망의 아골 골짜기는 가나안 땅 안에 있었습니다.
지리적 가나안 땅은 얼마든지 죄 때문에 괴로운 곳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또한 가나안 땅이나 더 이전의 에덴동산은 세상의 어떤 장소가 본질이 아닙니다.
그러니 그곳이 있었던 실제 위치를 찾는 것은 괜한 일일 뿐이겠지요.
하나님께서 다스리시고 주관하시는 성도와,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가 바로 에덴동산이고, 이스라엘이며,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은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만군의 주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니 야곱의 하나님께서 우리의 피난처이십니다.
말씀만이 우리의 피난처입니다.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우리와 언약을 맺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면 하나님 외에는 두려울 것이 없어집니다.
해를 입을까 두려워하고, 괜한 일로 근심하며, 공포심의 포로가 되는 원인은 내 안의 죄악에 있습니다.
그러나 속죄의 은혜를 입은 성도에게는 공포심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거듭나게 하셔서 ‘하나님께서 주도하시고 다스리시는 자’로 바꾸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사론은 양 떼의 우리가 되겠고, 아골 골짜기는 소 떼가 눕는 곳이 되어, 나를 찾은 내 백성의 소유가 되려니와”(사 65:10)
이제는 도리어 저주의 아골 골짜기를 은혜와 소망의 언덕으로 변화시켜주시는 놀라우신 주님,
그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피난처가 되어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의 유일한 피난처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힘이 되어 주십니다.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1b)
하나님께서는 쉬이 성도와 만나주시고 힘이 되어 주시는 피난처이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큰 환난이 닥쳐와도, 결국 이 세계의 마지막 날이 온다 해도
우리는 아무것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으며
그러므로 지금도 주님께 의지하여 맡겨진 일을 해나갈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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