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μελετάω 조심하다 애쓰다 묵상하다/마가복음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막 2:23-3:6)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요 14:27a)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참 평안이라서, 세상이 주는 어떤 가치나 만족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이 평안을 얻을 때, 우리는 참으로 쉼을 얻습니다. 

사람이나, 물건이나, 돈이나, 명예, 이념, 권력 등 그 어떤 것도 사람을 온전히 안식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또 놀라운 진리를 함께 알려주시는데, 이 평안이 주님의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평안은 주님께서 갖고 계신 것, 주님 안에 있는 것, 주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평안의 소유자도 주님이시고, 그것을 주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참으로 ‘평안’, 곧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

 

창조의 역사 이후로 세상이, 인간들이 끊임없이 안식일을 왜곡시켜 왔습니다. 

그로 인해 점차 퇴색되어 그 의미를 제대로 알기가 힘들어져 버렸습니다. 

이제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안식하시고 안식일을 정하신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를 듣고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창 1:31).… 하나님께서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께서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창 2:2-3).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사역을 마치시고

일곱째 날을 인간이 복을 받고 거룩함을 입는 날로 정하셨습니다.

이후 출 20:11에, 십계명 제4계명을 주시며 다시 말씀하시기를,

…일곱째 날에 하나님께서 쉬셨으며,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쉬셨다는 표현이 과연 어떠한 것을 뜻하는 것인지 인간이 가늠하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쉬셨다고 하셨으므로 어떤 방식인지 정확히 알기 어려우나 쉼을 갖으신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주님께서 쉬신 것과 같이 사람도 쉼을 누리고, 복을 받고, 거룩하게 되는 날입니다.

참으로 안식일은 주님께서 사람을 위하여 정하신 날인 것입니다. 처음부터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 좋은 안식일에다 무거운 수칙들을 덕지덕지 붙였습니다.

인간적인 해석과 규정들을 첨가해서, 이것저것들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면서 그 ‘규칙들을 지키는 행위’를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을 정하신 목적에 따라 쉬는 데에 의미를 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안식일의 규례들을 지키기 위해 애쓰고 수고하도록 변질시킨 것입니다.

하나님께 복을 받고 거룩함을 얻게 된다는 원래의 의도는 의미를 잃었고,

주님께서 정해주신 복의 통로가 정죄의 수단이 되어버렸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은 그들의 이 악습과 관행을 누룩처럼 퍼뜨려왔습니다.

 

이 악습을 수호하고자 하는 의지와 독기가 얼마나 강하고 살벌한지를 오늘 말씀 중에서 보게 됩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밀밭 사이를 지나가시는 것을 마치 염탐하듯이 따라가면서 주시하다가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기 시작하자 잘 걸려들었다는 듯이 즉시 예수님께 제자들의 행동을 비난합니다(24).

원문에는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기 시작했다’는 표현이 있고

바로 이어 바리새인들이 비난을 하였으므로, 

제자들이 한참 이삭을 잘라 먹은 후가 아니라

이삭을 잘라 먹기 시작할 때를 놓치지 않고 항의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3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는 밀밭 사이를 지나가셨지만

직접 이삭을 취하는 행동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이삭을 자른 이유도 길을 열기 위해 줄기를 제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으므로,

일부러 이삭을 취하기 위해 자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신 23:25에서,

네 이웃의 곡식밭에 들어갈 때에는 네가 손으로 그 이삭을 따도 되느니라 그러나 네 이웃의 곡식밭에 낫을 대지는 말지니라.

하는 말씀이 있는데, 그러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낫과 같은 도구를 사용하지 않았으므로 이삭을 자르거나 땄어도 율법을 어긴 것이 아닙니다.

아마도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곡식 알갱이를 취하기 위해서 이삭을 잘라 겉껍질을 비벼서 떼어낸 행동,

그것을 안식일 규례에서 금하는 노동에 해당되는 추수하는 일로 보았을 것입니다.

출 34:21의,

너는 엿새 동안 일하고 일곱째 날에는 쉴지니 밭 갈 때에나 거둘 때에도 쉴지며

라는 말씀을 적용해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추수 때에 안식일을 맞아서 추수를 하는 일을 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안식일을 범했다고 비난한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을 열기 위해 이삭을 자르고,

그래서 자른 이삭들의 껍질을 벗겨서 먹습니다. 이게 일입니까?

이렇게 날카롭고 무자비한 기준에 맞추자면 그 누구라도 정죄를 피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아마도 쉴 때에 아무 것도 안 하고, 먹지도 않고, 편의점이나 마트에도 가지 않고

가만히 하루 종일 24시간을 누워있는 게 편안한 사람은 가능할 것입니다. 일어나는 것도 일이지요?

 

바리새인들의 정죄에 대해 주님께서는 그들이 위대한 조상으로 여기는 다윗의 행동을 근거로 하여 그들에게 변론을 하십니다.

다윗이 사울의 살해의 위협을 피해 도망하던 중에, 놉 지역에 가서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진설병을 받은 일이 기록된 삼상 21:1-6의 내용을 인용하십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인용하실 때, 그 구절의 표현 그대로 차용하신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해석하신 바에 따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이것인데, 사무엘상에서는 제사장 아히멜렉이 ‘어찌하여 홀로 있고 함께 하는 자가 아무도 없느냐’고 다윗에게 묻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오늘 본문 25절에서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 시장할 때에’, 

또 26b에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라고 하시면서 다윗이 일행과 함께 있던 것으로 말씀하십니다.

 

당시 법궤가 있던 곳은 소박한 형태의 성막이었습니다. 

만일 그곳에 다윗이 ‘혼자’ 들어가서 진설병을 받아 피신해 있는 일행이 있는 곳에 가져가서 나누어주었다면

사무엘상의 기록과 주님의 말씀이 서로 모순이 없이 조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무엘상에서 다윗에게 진설병을 준 제사장은 아히멜렉인데,

주님께서는 아히멜렉의 아들인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라고 말씀하신 부분은 해석하기가 쉽지 않은 부분입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이 구문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마가가 실수로 잘못 기록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혹시 예수님께서 착각하셨을까요?

아니겠지요? 둘 다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말씀이십니다. 

물론 완전한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셨기에 기록된 구약 말씀을 배우고 익히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한 분 하나님이신 한

예수님의 말씀은 절대적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는 오류가 없으십니다. 성경은 오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일을 불가능합니다.

 

분명 주님께서 깊으신 뜻을 가지시고 의도적으로 아비아달을 언급하셨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다윗이 진설병을 얻은 이후의 말씀들을 읽어가다 보니 사무엘상 22장에,

사울이 에돔 사람 도엑을 시켜 놉의 제사장 85명을 죽인 일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도엑은 제사장 85명뿐만 아니라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젖먹이와 가축까지 무자비하게 살육했습니다.

이 때 한 명이 살아남아 도망갔는데 그가 바로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달이었습니다.

아비아달은 다윗에게 가서 이 일을 전하였고, 다윗은 

"두려워하지 말고 내게 있으라 내 생명을 찾는 자가 네 생명도 찾는 자니 네가 나와 함께 있으면 안전하리라 하니라"(삼상 22:23)라고 위로하며 생명을 지켜줄 것을 약속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렇게 아비아달의 이름을 언급하셨기 때문에, 

듣는 자들이 자연스럽게 다윗을 보호하고, 돌보고, 하나님께 다윗을 위해 기도한 ‘아히멜렉’과,

제사장들 수십 명을 살육한 사울의 악행을 떠올리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는 다윗을 죽이고자 한 사울의 행위가 얼마나 악하고 집요했는지를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의 제자들 모두에게 생각나게 하시는 효과를 낸 놀라운 지혜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께서 떠올리게 하신 그 사울의 ‘질투와 살의’가 그대로 바리새인들에게 드러나고 있는 것을 곧 보게 됩니다.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 (막 3:6)



주님께서는 다윗이 고난 받은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실 것이 예표 되었음을 알려주시는 것까지도 의도하셨습니다.

따라서 ‘아비아달’이란 선택은 실수가 아니라 오히려 주님의 깊고 놀라우신 ‘지혜’를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마가가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온전히 기록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막 2:28)

 

여기서 주인은 '주님, 주'라는 뜻의 헬라어 κύριος/퀴리오스/란 단어로 구약의 히브리어 '나의 주'(אֲדֹנָי)/아도나이/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주인’이라 하심은 안식일의 주님이시라는 뜻으로써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심을 선언하시는 말씀입니다.

안식일은 주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되었고, 주 하나님께서 주관하시고, 주 하나님께서 복 주시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안식을 주관하고 내려주시는 창조주이시고 구원의 주님이심을 밝히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쉼’, 곧 ‘구원’을 주실 수 있는 근거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사람의 아들이 되시는 것입니다.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시고, 또 죽기까지 낮아지시는 그 겸손과 비하가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근거를 마련하신 놀라운 비밀임을 알려주십니다.

만일 주께서 사람의 아들 곧 ‘인자’가 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질고를 겪으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당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죄악과 곤비함으로부터 쉼을 누릴 수 없게 되었을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 11:28-29)



인간들은 주님께서 정해주신 복된 안식일이라는 재료에다가

화학 물질과 공장의 기계를 첨가해서 희한한 것을 음식이라고 만들어 냈습니다. 

입에 달고, 자극적이고, 입맛에 당기지만 먹는 동안 서서히 몸은 파괴되어 갑니다.

인간의 손을 거친, 유대교와 바리새인의 손에 들어간 안식일은

마치 유해식품이나 괴물같은 것으로 변질되고 변형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성경에서 여러 차례나 언급되고 있는 그들의 모습과 같이 날카롭게 기준을 들이밀지 말아야 합니다. 

남을 정죄하고 고소할 일을 탐색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들처럼 높아지는 것,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 더 좋은 자리

더 윤택한 자리에 가는 것들이 결코 우리에게 평안을 주지 않습니다.

오직 주님을 본 받아서 우리는 더욱 나를 부인하고 더 나를 낮추는 자리로 내려가야 합니다.

그것이 언제나 우리의 영혼과 거룩함에 유익하며,

그것이 바로 우리의 진정한 쉼이고,

이 땅에서도 벌써 참되고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는 길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것이 바로 우리 주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정하신 참된 이유임을 우리가 기억하게 해주시기를 주님께 간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