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것과 같습니다. 7 그러므로 여러분은 믿음의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8 성경은 하나님께서 신실하심으로 이방인을 의롭다 하실 것을 예견하여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기를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인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9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들은 신자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습니다. 10 율법의 행위에 속한 사람들은 누구든지 저주 아래 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 책에 기록된 모든 것을 항상 지켜 행하지 않는 모든 사람이 저주 아래 있다."고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11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도 율법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것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고 반대로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그것들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저주받으셔서 율법의 저주로부터 우리를 속량하셨습니다. "나무에 달린 모든 사람은 저주를 받았다."고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14 이는 아브라함의 복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이방인들에게 있게 하시고, 또 믿음을 통해 우리들이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갈 3:6-14)
성경은 성령 하나님에 의해 기록으로 남겨진 영원한 진리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말씀을 한 번 보세요.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롬 14:7)
정말 그런 것 같습니까?
아닌 것 같지요?
꼭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지는 않더라도 우리는 대부분 자기를 위해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기 가족이나 자기 교회를 위하여 살고 또 목숨까지 바치려는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롬 14:7의 말씀은 거짓입니까? 진리가 아닌 말씀도 있는 것일까요?
그럴 수는 없겠지요? 그러면 뭐가 문제겠습니까?
사람의 번역입니다. 아래의 원어와 해석을 보세요.
οὐδεὶς γὰρ ἡμῶν ἑαυτῷ(여격, 'to himself') ζῇ καὶ οὐδεὶς ἑαυτῷ ἀποθνῄσκει·
우리 중에 아무도 자기를 위하여에게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에게 죽는 자도 없습니다. (롬 14:7)
ἐάν τε γὰρ ζῶμεν, τῷ κυρίῳ(여격, 'to the Lord') ζῶμεν, ἐάν τε ἀποθνῄσκωμεν, τῷ κυρίῳ ἀποθνῄσκομεν.
왜냐하면 우리는 살아도 주을 위하여께 살고, 죽어도 주을 위하여께 죽기 때문입니다.
ἐάν τε οὖν ζῶμεν ἐάν τε ἀποθνῄσκωμεν, τοῦ κυρίου ἐσμέν.
그러므로 살든지 죽든지 우리는 주님의 것입니다. (롬 14:8)
이해를 돕기 위해 지혜서 가운데 전도서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1 내가 이 모든 것을 마음에 두고 살펴보니, 의인들이나 지혜로운 자들이나 그들이 하는 일들이 전부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사랑일지 미움일지 자기 앞에 있는(미래의) 것을 알지 못합니다.
2 모두에게 같은 일이 닥치니, 의인, 악인, 선한 자, 깨끗한 자, 부정한 자와,
제사를 드리는 자와, 제사를 드리지 않는 자,
선인이나, 죄인이나, 맹세한 자나, 맹세하기를 두려워하는 자가 똑같습니다.
3 해 아래에서(이 세상의 모든 시공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이 악하니 일어나는 일이 같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악으로 가득 차 있으며 그들의 삶에서 미친 마음을 품다가 마침내 죽은 자들에게로 갑니다.
(전 9:1-3)
위의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세상의 인류는 절대로 하나님을 위해서 살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기본권을 주장하며 혁명을 일으키든 무슨무슨 이유로 전쟁을 벌이든 간에 인간이 열심으로 힘쓰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들이 좋자고 하는 것이지요.
전도서에서는 그것을 오직 먹고 마시고 기뻐하는 것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전 8:15).
사람은 육체로 살기 때문에 해 아래에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지혜자가 말씀하시니 아무리 찾으려 애를 써 봐도 사람이 눈으로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야 된다고 주장하고 있는 이상한 집단이 있습니다. 교회죠?
그러나 이 아브라함의 자손들도 이 땅에서는 하나님 앞에서 한없이 부족한 믿음(지식과 행위)을 보일 수밖에 없지요(롬 4:2).
왜냐하면 육체를 가진 모든 사람은 완전히 썩어 버려서 포악을 떨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창 6:13).
하나님의 일과는 별개로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치열하게 자신의 삶을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사람이 아무도 지키지 못하는 율법이나(롬 2:23), 자신의 믿음이나, 계획, 결단, 의지, 지혜, 용맹함 같은 것들을 스스로 자랑해도 될까요? (삿 7:2; 시 12:3; 잠 27:1; 사 13:19, 20:5; 렘 9:23-24; 롬 11:18; 고전 1:29-31, 3:21)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조차도 사실은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인데 어찌 자기 스스로 행함을 자랑하겠습니까? (고전 9:16; 고후 1:12).
우리들이 다 이 세상에서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스스로를 살아가는 육체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온전히 하나님을 위해 살지 않는 것은 사람이 자기 왕께 복종하지 않는 반역입니다.
반역자들은 결국 잡혀서 처형될 수밖에 없습니다. 왕께 죽은 목숨이죠(롬 14:8a).
그렇게 죽을 자들을 살려 주신 분을 모르고 세상의 어두운 길을 걸어간다면 그 사람은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 없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시 23:4; 요 14:6).
우리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진노하신 왕의 처벌을 면하기 위해 반역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 뿐입니다.
왕의 사면.
그러나 왕이 왜 반역자들을 살려줘야 합니까?
벼랑 끝에 선 그들에게 생명을 허락할 까닭이 있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정말로 그 이유가 왕께 있으셨으며 그 때문에 우리가 사면되었다고 알려 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래의 구절에서 '위하여'가 쓰인 부분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뜻을 더욱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καὶ ὑπὲρ πάντων ἀπέθανεν,/ ἵνα οἱ ζῶντες/ μηκέτι ἑαυτοῖς ζῶσιν/ ἀλλὰ τῷ ὑπὲρ αὐτῶν ἀποθανόντι καὶ ἐγερθέντι.
모든 사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은/ 산 자들이/ 더 이상 그들 자신에게 살지 않고/ 그들을 위하여 죽으셨다가 다시 일으켜지신 그분께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고후 5:15)
여기서 ὑπὲρ/휘페르/'~을 위하여, in behalf of, for the sake of'는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행사에만 쓰였습니다.
이처럼 성경은 헌신의 행위라는 인간의 생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행하심만을 강조하고 있지만,
사람과 그들의 행위들을 강조하는 소견이 끼자 다른 복음이 되고 말았습니다.
해 아래 누가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까? 이는 일생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치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그래도 몇몇은 처음부터 자기 스스로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아무도 그럴 수가 없습니다. .
예를 들자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더니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습니다(창 15:6; 갈 3:6).
그러나 먼저 주께서 그에게 믿음을 주시지 않으셨다면 그가 말씀을 믿었을까요?
믿을 만한 말씀이 아니었다면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을 수 있었겠습니까?
믿음은 사람이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믿음(지식, 행위)을 갖기 전에 우선 먼저 신실하신 말씀이 필요하지요.
예를 들어 야고보서를 보면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 하였습니다.
영혼과 몸이 분리되면 죽듯이 행위가 믿음에서 분리되면 죽은 것이죠.
동일하게 전체 성경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이 행하는 것이 죄악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행함이 강조될 때는 이미 주께서 주신 믿음(지식)이 우리에게 있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고,
그래서 신자는 세상 사람들과 달리 그 믿음으로 성경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언제나 복음이 먼저 있었으며, 오로지 그리스도의 신실하심 때문에,
그로 말미암아 아브라함도 우리도 복음으로의 믿음을 얻었고,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그와 우리들에게 의로 여겨 주셨던 것입니다.
(וְהֶאֱמִ֖ן בַּֽיהוָ֑ה וַיַּחְשְׁבֶ֥הָ לּ֖וֹ צְדָקָֽה׃)
그는 주 안에 믿었고 주께서는 그것을 그에게 의로 여기셨다. (창 15:6)
그와 똑같이 우리도 신실하신 그리스도 안에 복(성령의 약속)을 받고 안식을 얻게 됩니다.
죄와 사망의 저주가 이미 모든 사람에게 내려졌지만 동일한 말씀이 우리에게는 복음이니(창 3:14-19, 15:5),
왜냐하면 이미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않다. (마 10:38)
만일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기 원하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막 8:34b)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눅 14:27)
우리 선한 목자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시고 율법이 가리키는 저주의 형틀로 향하셨습니다(신 21:23).
세상에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과 그러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데,
자기가 마땅히 받아야 할 죽음의 저주를 받고서 그리스도를 따를 하늘의 별들처럼 셀 수 없이 많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주의 몸)을 '위해서' 특별히 그들의 저주를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죄인들에게 어떤 믿음이(행위가) 있기 전에 어마어마한 죄값, 즉 우리들 모두에 대한 죄책과 형벌을 미리 다 치르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죽고 주만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은 자기가 율법을 지켜서가 아니라 값없이, 오직 주의 은혜(자비, 복)로만 구원을 받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지요(계 21:6, 22:17; 고전 9:18).
아버지께서 베푸시는 자비, 곧 주께서 주시는 복은 말씀으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율법에서 복음을 발견하지 못하는 이유는 해 아래 보이는 데서 찾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왕께서 특별히 우리를 살려주신 까닭은 우리들이 하나님을 믿기로 결단했기 때문도 아니고, 주를 위한 선행들의 공로를 인정받아서는 더더욱 아닙니다.
언제나 하나님께서는 율법 안에서 사는 사람들 때문이 아니라(갈 3:12),
율법 안에 담긴 주의 뜻을 완전히 이루신 그리스도의 신실하심, 즉 복음의 믿음을 이유로 우리를 사면시켜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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