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들이 그를 통해서 존재하게 되었고, 그 존재하게 된 것은 어느 하나도 그 없이 생겨난 것이 아니다. (요 1:3)
삶이 예배가 된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예배의 목적이 의식으로 전락해버리면 안 됩니다. 의식은 말하자면 그림자입니다. 상징적인 것이죠.
예를 들자면, 세례를 받을 때 신자의 머리에 물이 뿌려지는 의식을 치릅니다. 그것은 내 내면의 변화를 가시적으로 증거하는 표일 뿐입니다.
그 물 세례 예식은 이기적인 나의 옛 본성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을 상징합니다. 세례의 본질은 그것입니다.
대홍수의 비가 택하심 받은 백성에게 뿌려졌고 살아남게 되었듯이 성도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이미 참여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 의식을 행하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예배의 본질에 있습니다.
예배를 통해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를, 내 부족함을 부끄러워 말고 주님 앞에서 드러내십시오.
내가 누구인지,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는 나를 숨기지 마십시오.
불투명한 미래에 대해 계속해서 걱정하지 마십시오.
언제까지 거듭나지 않은 사람으로 살고 싶습니까? 내 자아를 붙들고 언제까지 나만의 꿈을 위해 살아가고 싶습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은 이미 내 자아가 죽었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입니다. 이런 사람이 우리들입니다.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마 12:30)
주님과 함께하지 않는 것은 모두 다 그리스도를 반대하고 적대하는 것입니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마 10:38)
누구든지 나무에 달려 죽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지 않으면 다 그리스도를 반하는 것입니다.
이기적인 자아가 죽어야만 주님께서 우리 삶 속에서도 영광을 받으십니다.
나의 자아는 교만과 자기중심적인 사고로 나타나는 반역과 불순종과 불신의 결정체입니다.
절대로 교회는 인간관계와 삶의 질을 개선하기 위한 도구가 아닙니다.
만일 자신의 평안과 위로를 위해서 교회를 찾아온다면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자아를 끝장내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 삶에 요구되는 결단과 믿음, 헌신의 자세, 즉 태도는 다른 어떤 것도 아닙니다.
나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지배당하는 나라를 떠나야 합니다.
나는 죄악된 과거를 잊고자 하나 계속해서 옛 것에 집착하고, 스스로의 노력으로 잠재력과 가능성을 최대한 발전시키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아무리 발버둥을 쳐 봐야 소용없습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나를 지탱해 줄 다른 것들에 의지하고 자신의 교만에 영향분을 공급할 뿐입니다.
이 점에 관해서 여러 가지 심리학적인 방법이 동원됩니다. 자존감을 높여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런 말이 아닙니다. 개개인의 성격 문제가 아니라 모든 인간의 본성 문제입니다.
숨겨진 나의 잠재력이 깨어나면 내가 변화될까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좋다고들 하는 사상이나 문화나 조상의 혈통과 가정환경 등에 의지해 자신을 개선하고 발전시키려고 노력합니다. 자기 개발에 목을 매는 것이죠.
그렇다면 과연 우리가 그렇게 해서 좀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실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주 하나님의 도우심 없인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를 원하십니다.
자기를 포기하고 주님께 동참하는 법을 아는 새 사람이 되어서,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심을 시인하고 기뻐하며 믿음으로 평안을 누리기를 바라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주님께서는 결코 우리가 할 수 없는 것들, 곧 주께서 기뻐하시는 일들을 우리에게서 이루어 가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말씀이신 까닭은 그분께서 하나님을 알리시고 주의 뜻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행하심으로 모든 것이 생겨났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없이 존재하는 것은 온 하늘과 땅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참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요 1:3-4).
그러니까 단순히 나중에 지옥에 가지 않을 것이라고 좋아할 일이 아닙니다.
주께서 우리를 새롭게 하셨고, 날마다 새롭게 하시기 때문에 기뻐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말씀 없이 물이 포도주가 될 수 없고, 말씀 없이 물 위에 성령님께서 운행하시지는 않습니다.
말씀이신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거룩한 영을 통해서 우리의 옛 자아를 완전히 끝장내시고,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모습을 우리 삶에 나타내시기 위해 새 사람을 우리 안에 지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설교를 통해 여러 차례 들은 바 있는 '결심'과 '헌신'은 이 일에 사용되어야 합니다.
내 안에서 나는 계속해서 작아져야 하고 그리스도께서 자꾸 커지셔야 합니다. 나는 죽고 그리스도만 사실 것입니다.
그런 잠재력을 가진 우리에게 주님께서 결단을 요구하십니다. 이 일은 자기 십자가에서 내려와서는 되지 않습니다.
여전히 내 영광스러운 미래를 위해 살고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살기를 원하시지 않습니까?
말씀을 주야로 묵상할 수 있습니다. 이는 참 생명이 우리 생활의 양식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방법입니다.
말씀의 은혜를 받아도 계속해서 생각하지 않으면 금세 기억에서 잊혀지게 마련이지요.
우리가 날마다 '나라가 임하시오며'라고 기도하지만 그 뜻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주여, 저의 나라를 없애시고, 주의 나라가 임하십시오.'
내 나라가 망하기 전에는 결코 내 안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지 않으십니다.
내가 왕좌에서 내려와야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을 갖고 살고 있는 것은, 오직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해 자기 몸을 내어 주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갈 2:20, 쉬운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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