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전후 문맥을 고려하여 '죄에 대하여 우리는 죽었다'(ἀπεθάνομεν τῇ ἁμαρτίᾳ, 롬 6:2)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앞서 성경을 살펴본 바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우리도 그분 안에서 죽었는데, 그것을 죄에 대한 죽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3-10).
하지만 우리는 아직 살아 있으므로 그 죽음은 단순히 육체의 사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지난번에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말씀에 대해 나눈 적이 있습니다(롬 6:23a).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 2:17) 말씀하신 대로 전체 성경에 잘 드러나고 있듯이 죄에 대한 형벌이 바로 죽음입니다. 죽음은 범죄에 대한 합당한 보응인 것입니다.
하지만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신 그리스도의 죽으심은(10a)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한 형벌을 감당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죄에 대한 삯이었습니다.
그 형벌을 많은 사람들 대신 받으시어 단번에 죽으심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셨습니다. 그리고 그렇다면 우리의 죄에 대한 죽음도 그런 차원에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롬 6:3)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에 대한 벌을 이미 받았다는 의미로 죄에 대해서 죽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옛 사람은 이미 죽었고, 지금은 벌써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고후 5:14b-15)
다시 롬 6:6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6:6)
'우리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옛 사람이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을 멸하기 위해서이고, 더 이상 우리가 죄의 종노릇 하지 않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죄의 종인 상태, 즉 죄의 속박에서 구원받기를 원하는 우리의 마음일 것입니다. 여기서 '죄의 몸'은 인간의 육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육신에 속한, 즉 죄악된 본성을 가진 인간의 전인격을 의미하죠. '자아'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롬 6:12)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죽었지만 우리에게는 사욕이 있고, 그것으로 인해 죄가 우리 몸을 지배하려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아의 사욕에 순종하지 않을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죄의 종 노릇 하지 않는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더 이상 우리에게 주인 행세를 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죄악된 자아, 곧 죄의 몸이 멸해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결국 2절에서 '죄에 대하여 우리가 죽었다'는 것은 6절에서 '우리의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나무에 못 박힌' 것과 동일한 의미입니다. 그리고 죽은 그것은 거듭나기 전에 나였던 나의 모든 것(전인/생명)입니다.
여기까지의 핵심은 '옛 사람'이 '죄의 몸'과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옛 사람은 이미 죽은 것이고, 죄의 몸은 아직 죽지 않고 있고 우리는 아직도 죄에게 종 노릇 하기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롬 6:6의 말씀을 오해하기 쉬운 이유 중 하나는 이 구절이 갈 5:24과는 완전히 다른 의미임에도 불구하고 연관해서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똑같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표현이 있기 때문이죠. 그러나 본문의 구절은 우리에게 일어난 일에 대한 말씀이고, 갈라디아서에서는 우리가 행한 일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정리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인 우리는 죄에 대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단번에 죽은 것입니다. 이 죽음은 과거의 일로써 유일하고 반복될 수 없는 것이죠. 그리고 한편으로 현재의 우리는 자아에 대해서 매일 죽습니다.
2절과 6절의 죽음은 전자에 관한 말씀인데요, 그렇게 설명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칭의에 바탕을 두고 성화를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즉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의 성화란, 거룩하게 살기 위해서 단순히 현재적인 성화의 방법에만 관심을 가져서 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칭의에 대한 이해와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이제는 교회가 구원의 차원을 넘어서 성화의 단계로 가야 한다고 말한다면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칭의에 대한 확실한 지식의 기반이 없으면 성화는 이해할 수 없는 모순 덩어리에 지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분명히 칭의에 대해서, 그 다음에 성화에 관해서 말씀하고 있지만 그것들을 각기 따로따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방식을 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성화는 구원과 땔래야 땔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성경이 오늘날과 같이 장과 절로 구분된 것은 16세기 이후의 일입니다. 그전까지는 그냥 다 이어진 문장들이었고 그것은 이 로마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이들이 6:1이전까진 칭의, 그 이후는 성화에 관한 내용이라 생각하는 그 틀 안에서 이해하려 했습니다. 그렇게 모순을 안은 지식이 오랫동안 전파되었기에 우리도 여태까지 개인의 구원과 성화에 대해서 따로 떨어뜨려 설명하는 말들을 들어 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닙니다. 분리될 수 없이 이어져 있습니다. 성경은 구원을 이미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으나, 그와는 별개로 이제 우리의 삶에서는 성화의 모습이 나타나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은 죄에 대하여 죽으신 것이며 따라서 우리 옛 사람의 죽음도 그리스도와 함께 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 따로 우리의 죽음 따로가 아닌 것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합니까?
우리는 죄에 대해서 죽었지만 아직도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함의 소망을 품고 있으나 여전히 현실은 죄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전에 들었던 대로 구원받은 이후로는 죄를 지을 수조차 없는 거룩한 몸이 되었다면 아무 문제가 없겠지만 그러나 우리의 생활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무오합니다. 다만 인간의 부족한 오성이 문제일 뿐입니다. 그래서 성령 하나님께서는 친히 택하신 백성들에게 임하셔서 인간이 스스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가르쳐주시고 깨닫게 해주십니다.
또한 그 일에 특별히 몇몇 사람들을 쓰시기도 하십니다. 먼저 깨달음을 주신 분들을 쓰시지요. 그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사명대로 증인으로서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어 다른 이들에게 그 가르침과 깨달음들을 전할 것입니다.
아무런 대가 없이 그렇게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마찬가지로 값없이 주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받았고, 심지어 다른 이들보다 먼저 은혜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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