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하시고 마음이 순수한 사람들에게 선하신 분이지만..
그러나 저는 거의 발이 걸려 하마터면 미끄러질 뻔했습니다. 악인들이 평안하고 잘되는 것을 보고 그 자랑하는 사람들을 부러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아무 문제도 없고 도무지 힘을 잃지 않습니다. 남들처럼 근심 걱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병에 걸리는 것도 아닙니다.
참으로 그들의 죽음에는 고통들이 없고, 그들의 몸은 살쪘으며, 고생도 없고, 사람들처럼 재앙을 당하지도 않습니다. (4-5)
그러니 그들은 교만의 목걸이를 차고 폭력을 옷처럼 입었습니다. 번들거리는 살찐 눈으로 으스대며 다니는 그들의 마음속은 망상으로 넘치며 방탕하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비웃고 악하게 압제하며 높은 곳에서 말합니다. 입은 하늘에 두고 그들의 혀는 땅에 두루 다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이 여기로 돌아올 때 충만했던 물들이 그들 때문에 말라 버렸습니다. (10)
(לכן [ישיב] ישוב* עמו הלם ומי מלא ימצו למו)
그리고 그들이 말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알겠냐, 지극히 높은 이에게 지식이 있겠느냐?”
보십시오, 이들은 확실히 악인들입니다. 그런데도 항상 삶은 평안하고 재물도 늘어 가기만 합니다. 그들의 삶은 형통합니다.
어째서 선하신 하나님께서 저들을 그냥 놔두십니까?
저들의 앞날은 환하기만 한데 왜 우리는 내일을 기약할 수도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까?
정녕 제가 마음을 정순하게 한 것이 헛되고 손을 깨끗하게 씻은 것이 헛되니,
저는 온종일 맞으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고 있습니다.
제가 만약 “그러니까 나도 저들처럼 그렇게 살겠다”라고 했다면 주님의 아들들의 세대를 배신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 (16)
혼자 생각하며 깨우치려 했습니다. 그러나 눈이 아프도록 고생스러웠습니다.
(ואחשבה לדעת זאת עמל [היא] הוא* בעיני)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눈에 고생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17)
(עד אבוא אל מקדשי אל אבינה לאחריתם)
그랬는데 주님의 성소에 들어와서 마침내 그들의 종말을 깨달았습니다.
어떻게 깨닫게 되었습니까? 이 부분이 중요합니다. 이것을 자기가 스스로 깨달았다고 생각하여 그렇게 말하면 안 됩니다.
당연히 안 되겠죠? 이전에도 수차례 강조했지만 그래도 중요하니까 또 말씀드리겠습니다.
내가 생각해서 깨달은 것 같지만, 그래서 그렇게 말하고 싶지만 사실은 성령 하나님께서 나의 자유의지를 사용하셔서 일하신 것입니다.
모든 공로는 오직 주님께 돌려야 합니다. 주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습니다. 모든 선한 것은 주께로부터 나옵니다. 오로지 주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니 깨달음의 원인은 결코 나 자신에게 있지 않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야 고통만 커지지 답은 나오지를 않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보혜사'(은혜를 보호하는 스승) 성령으로 우리에게 충만히 임재하여 주십니다. 그래서 악인들의 종말에 대해서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다. (אבוא אל מקדשי אל)
(בּוֹא)/보/‘들어가다, 들어오다’인데요. 들어옴이 있으면 바깥에 있을 때도 있습니다. 바깥에 있다가 들어오는 것이죠. 그렇게 우리가 성소에 출입합니다.
'성도'란 하나님 안에서 사는 무리(교회/회중)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이 땅의 성도는 성령으로 충만할 때가 있고 그렇지 못한 때가 있습니다.
시인은 그렇게 충만함으로 들어갈 때에 비로소 깨달음을 얻은 것입니다. 그들의 종말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령에 충만할 때 우리도 그 깨달음을 얻습니다. 주님 안에서 깨닫게 되는 바는 이렇습니다.
‘사람은 이 시공간 안에서 사는 동안은 한시적인 존재이다. 그러나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주께서 그들을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그들은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시 90:1-7)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인생들아, 너희는 돌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앞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고 밤의 한 순간 같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진노하심에 끝나고 주님의 노하심에 두려워 떱니다. 그러니 ‘인생의 진짜 행복은 이 땅에 있지 않구나.’ 이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 편에서 보면 밤의 한 순간도 못되는, 그게 천 년이라고 했으니 그 한 순간을 천으로 쪼갠 시간 동안 이 땅에서 살고 마는 것이 인생입니다.
여기서 아무리 행복한들 그 잠시 후에, 조금 후에 주님 앞에서 영원의 시공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행복할 수 없으면 아무 소용 없습니다.
우리가 성소에 출입하는 존재라는 것은 이 땅에서는 항상 범죄하지 않을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성령 충만할 때는 범죄하지 않지만 성소 밖에 나와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가 바랄 수 있는 은혜는 무엇일까요? 참으로 날마다 범죄하는 우리가 땅으로 향한 눈을 돌이켜서 하나님께로 고정할 수 있게 해주시기를 간구할 것입니다.
주께서 참으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시 73:18)
주님께서는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고 황폐한 곳에 떨어뜨리셨습니다. 그들이 어찌나 순식간에 망했습니까? 그들은 공포 속에서 완전히 멸망했습니다.
주여, 잠에서 깬 사람이 꿈을 무시하듯이 주께서 깨실 때 그들의 형상을 멸시하실 것입니다(18-20). 그들이 자랑하는 모든 것들은 한 순간에 쓸려갈 것입니다. 그림자와 같으니 전혀 의지할 바가 못되는 것입니다.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고전 7:31)
'이 세상에서 물질을 많이 소유한 자도 없는 것 같이 생각하라. 왜냐하면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요일 2:17a)
그러므로 회개합니다.
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양심이 찔렸나이다.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21-23)
제 마음이 쓰리고 제 콩팥이 찔리듯이 아팠습니다. 제가 이같이 우둔하여 아는 것이 없으므로 주님께 짐승과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항상 주님과 함께 있었으니 주님께서 제 오른손을 잡고 계셨습니다.
제가 주님과 함께 있었는데, 그것은 제가 주님을 붙잡아서가 아니고 오직 주님께서 은혜로 제 손을 붙들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주의 교훈(가르침)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이 한순간이 지나고 난 후에는 영광(하나님의 모습/위엄)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24) ...
그러므로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제게 복입니다. 제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할 것입니다 (28)
앞서 시인은 악인이 현실에서 누리는 ‘이 형통함이 결코 형통함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형통하게 보이는 악인들이 누리는 것들이 하나도 좋은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주님밖에 사모할 이가 없는 성도의 인생이 박탈과 상실로 인한 고통뿐입니까? 아니지요. 이 땅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선대와 축복 가운데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알게 된 것보다도 정말로 더욱 중요한 것은, 깨닫기 이전까지 가지고 있었던 시인의 근본적인 이해(가치관)가 변화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참으로 이게 안 되면 아무리 행실이 훌륭해 보이는 성도일지라도 끝끝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 생각에만 갇혀 있게 될 뿐입니다.
그와 같이 누구보다도 신실하게 하나님을 믿는다 하며 의로운 삶을 추구한 자들이 성경에 있지 않습니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지요.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의는 그 사람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스스로 의롭다 하는 그들의 의보다 훨씬 더 나은 것입니다.
고정관념, 그 생각의 틀, 이해의 범주를 넘어서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그걸 세우느라 아무리 오랜 시간과 많은 공을 들였다고 해도..
이제는 그 울타리를 다 허물어 버리고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으로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바른 신앙을 얻는 것도 깨달음을 주시는 성령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주시는 은사는 ‘오직 예수님, 오직 은혜’입니다.
오늘 시편 말씀은 성도의 삶이 힘들어 보여도 그것이 도리어 주님의 은혜 안에서 형통한 것임을 깨닫게 해줍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우리는 바른 신앙인, 훌륭한 성도가 되어야 한다는 의식 때문에 은혜의 분량을 놓치는 미련함 속에 자기를 가두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평안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감사하십시오. 신앙생활은 경쟁해서 이겨야 성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의의 경쟁 그런 거 아닙니다.
신앙인의 삶이 특별한 것은 남들보다 더욱 선을 행하며 올바르게 살아서가 아니고, 자기의 죄와 잘못을 겸손히 인정하고 살아가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십니다. 그러니 신앙생활을 보이는 행위로 너무 잘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할 수 있을 만큼 하는 것이 좋은 방법입니다. 그러는 것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분량입니다. 왜냐하면 믿음 안에 행위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아직 작아서 거의 없는 거나 다름이 없는데 행실만 크고 훌륭하게 나타내려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입니다. 외식이고 위선이지요.
여러분, 성경에 모세나 다윗 같은 사람들이 나오는 것은 결코 우리가 다 그들처럼 행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전혀 아닙니다.
그들의 생활상과 삶의 행위들을 보면서 성도의 생활이 어렵고 괴롭겠거니 하고 생각된다면 아주 방향이 잘못된 것입니다.
성도는 그들 인간의 행위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행하심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직 주님의 은혜로 그 단단한 울타리를 깨어 바른 믿음에 이르기를 소망합니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25)
하늘에 누가 저를 위하여 있겠습니까? 주님 외에는 제가 땅에서 기뻐하는 것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저의 복입니다. 제게는 하늘에 계신 주님밖에 없고 땅에도 주님밖에 없습니다. 아멘.
'μελετάω 조심하다 애쓰다 묵상하다 > 시편Ⅲ' 카테고리의 다른 글
#76 하나님의 전쟁 (1) | 2022.11.08 |
---|---|
#75-3 오직 한 나무 (0) | 2020.04.26 |
#75-2 멸하지 말라 (4) (0) | 2020.03.21 |
#75-1 징벌 (0) | 2020.03.19 |
#74 소망 (0) | 2020.03.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