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노래는 압살롬이 망하고 다윗이 다시 왕의 자리로 돌아오면서 드린 기도로 보이며 그의 기억과 신념과 서원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며 내 기도에 유의하소서
내 마음이 약해 질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 (시 61:1-2)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마음이 약해지고 심히 괴로울 때 사람은 낙심하고 원망하는 불신앙으로 가기 쉬우나 그때 기도하는 것이 은혜입니다.
그 기도는 땅끝에서 주님을 찾는 것입니다.
내가 이 땅에서도 끝에까지 와 있지만 바로 여기서 하늘에 계신 주님을 찾는 것입니다.
주님께로부터 이렇게나 멀리 떠나 있는 곳에서 말씀을 찾는 놀라운 기도입니다.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이심이니이다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머물며
내가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하리이다 (2b-4)
다윗은 어려울 때나 기쁠 때나 언제든지 주 하나님께서 계신 곳으로 피하기를 원했습니다.
신자라도 환난이 닥쳤을 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간의 방법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에도 하나님께서 되게 해 주셔야만 되는 것으로 아는 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그러나 그 내가 생각해낸 방법으로 해결될 것으로 믿고서 하나님을 찾지 않으면 벌써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인간적인 방법 자체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듯, 내가 믿는 것 자체는 나의 신념이지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물론 그 신념이나 신뢰가 참된 신앙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 안에 말씀과 성령이 있을 것입니다.
주 하나님께서는 신뢰가 가는 말씀으로 성령을 통해 참 신앙을 주셨는데 사람은 언제나 자기만 생각하고 자기 뜻대로만 하려 합니다.
그래서 진실로 구원하는 힘이 있는 복음의 말씀은 멀리하고 않고 순종하지도 않는 그것이 불신앙입니다.
사람에게 자기 신념보다 먼저 말씀과 성령이 계시면 그 신념은 참된 신앙심에 포함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아예 불신앙입니다.
그냥 자기 소견대로 믿는 것일 뿐이죠. 거기는 주님께서 계시지 않는 곳입니다.
그러나 내가 내 생각보다도 먼저 말씀과 성령이 계시도록 만들 수는 없습니다.
오늘 말씀에 "그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저를 인도하소서"(2b)라고 한 구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게 높은 바위로 저를 인도해 주십시오 (לבי בצור ירום ממני תנחני)
제게 너무 높아 저 스스로는 도저히 오를 수 없으므로 주께서 그 높으신 말씀으로 저를 이끌어 주셔야만 됩니다.
언제나 주께서 나보다 앞서셔서 계십니다.
주 하나님이여, 주께서 나의 서원을 들으시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가 얻을 기업을 내게 주셨나이다 (5)
다윗은 먼저 자신이 받은 은혜를 알았고 기억했습니다.
우리 생활에 가장 필요한 것도 주님께 받은 은혜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남의 죄는 잘 기억하고 하나님의 은혜는 쉬이 잊습니다.
유감스러운 말씀이지만 모든 자범죄들이 처음에 발생하는 곳은 가정입니다.
모든 사람은 죄성으로 인해 먼저 부모의 죄들을 보고 잘 기억합니다.
아직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기 전에 죄의 영향을 받아 그렇게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교육을 위해서는 죄를 깨닫게 하는 초등학문인 율법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보지 않고서도 보이지 않는 말씀을 믿게 되는 제자에게 더욱 복이 있습니다.
물론 보고서 믿은 도마도 복되지만 보지 않고서도 믿는 제자에게는 더 큰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참. 요 20:29).
...주께서 나의 서원을 들으시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가 얻을 기업을 내게 주셨나이다 (5)
주께서 나의 서원을 들으셨음을 믿는 것이나 주께서 기업을 내게 주셨다는 사실도 깨달음을 얻어 믿게 된 것이니 그 모든 일은 내가 스스로 한 것이 아니고 먼저 성령 하나님께서 알게 해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주의 이름’이라 함은 주 하나님, 주님을 가리키는 성호인 ‘주’(יְהוָה)/아도나이/'여호와, 주'입니다.
과거에 받았고 또 지금까지 받은 은혜들을 나의 주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은 불신앙입니다.
누구든지 받은 은혜를 생각하면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와 신실하심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과거와 같이 앞으로도 계속해서 주의 인자와 진리로 영원히 구원하여 주실 것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아직 참 신앙인이 아닙니다.
옛날을 생각하면서 '아, 어짜피 이렇게 나중에는 구원받을 걸, 그때 그 질풍노도의 시기에 다른 사람들처럼 마음껏 죄를 범했으면 좋았을걸... 그때 확실하게 죄를 지었어야 했는데, 다른 애들 다하는데, 나도 그냥 다 해볼걸...' 그렇게 생각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주께서 애굽 밖으로 나갈 수 있게 인도해 주신 구약 백성들 생각하고 똑같은 것입니다.
'내가 저 애굽 땅에서 노예생활 하는 게 차라리 더 나을 뻔했다. 죄에 속박 당해 있을 때가 낫지 않냐? 이게 뭐냐 지금 아무것도 눈에 보이는 것 하나 없지 않냐?' 이건데, 참 눈에 보이는 것들을 좋아합니다.
다윗은 하나님 중심의 사상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이는 머릿속의 지식적인 사상을 말하는 것이고 바로 그런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지식과 생각이 없는 신앙심은 사람을 지배당하고 굴종하게 만듭니다.
주님을 생각하지 못하고 주님을 찾을 수도 없으면 참된 지식의 깨달음도 없습니다.
행위 중에 우리가 참된 믿음으로 행할 만한 일은 주님을 바라보는 것밖에 없습니다. 이 일만큼은 가식이나 외식이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세상의 온갖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것들이 문화의 탈을 쓰고... 문화라 하면 뭔가 고상해 보이고 좋은 것 같지 않습니까? 뭔가 인간을 존중하고 위하는 것 같고 그러나 그 내용이 어떻습니까? 그 중심을 꿰뚫어 보고 계십니까?
유튜브로 보고 어떤 매체들을 보아도 드라마나 영화나 음악이나 사람들이 가장 열광하는 것들은 선정적이거나 폭력적인 것들입니다. 사람은 모두 다 죄에 속박당해 있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 사람의 말과 매체들의 노랫소리와 글들과 화면을 맹신하게 됩니다. 지배받는 것입니다.
조금만 있으면 자발적으로 복종합니다. 그렇게 인간은 이 땅과 함께 죄의 저주와 속박을 당해왔습니다. 우상들을 숭배해 온 것입니다.
언제요? 저는 우상 숭배한 적 없는데요? 그럴까요? 구약에 바알이 우상입니다. 바알이 지금 없습니까? 바알은 비와 번개를 쓰는 폭력의 신으로 사람이 만들어낸 우상입니다.
아세라는요? 성적인 타락을 원하는 인간의 죄악된 마음이 그런 우상을 만들어냈고 지금도 그러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이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악한 우상들을 섬기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우상들의 노예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것들 좋아하고, 보이는 것들에 빠져들고, 뭐가 뭔지 알지도 못하고 저절로 그러고 있는 것입니다.
본질이란 말은 물론 보이지 않는 것을 가리키는데 그것은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실제이며 실재입니다. 사실이고 진실이죠.
언제나 눈에 보이는 것들이 도리어 허상인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보이는 것들에 소망을 품는 것의 본질은 우상 숭배입니다. 다른 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얼마나 무섭습니까? 보이지 않는 하늘만 바라라는 말씀이 우리에게 너무 어려운 요구인 것 같습니까? 하지만 그것만이 살 길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광야의 떠돌이 생활을 하는 백성들, 우리 온 성도들이 광야에서 아무 것도 눈앞에 보이는 것이 없고, 장래의 길이 보이지도 않고, 목적지가 어딘지도 모르겠고, 내가 어떻게 될 거라는 생각도 없고, 지금 아무것도 가진게 없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그런데 하나님도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도 않으시고...
그러나 그 보이지 않는 곳에 주님의 은총을 감추어 두셨습니다.
그러니 지금 여러분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런 상황에 놓여 있다면 오히려 기뻐할 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정말로 그 위에 더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포기하고 눈에 보이는 것들을 좇으시겠습니까?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하는데 그래도 계속해서 우상을 섬기겠습니까? 마음은 안 된다고 하지만 육신에 메인 사람은 다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롬 5:20)
하지만 원래 죄가 깊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는 것입니다. 어째서냐면, 분명 주님께서 성도를 멸하지 않으실 뜻을 가지신 까닭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자신이 지금 너무나도 죄인이라 생각이 되어도 낙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고 은혜 주시기만을 고대하고 계시는지 주님의 생각의 높이와 깊이와 크기는 인간이 가늠할 수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과거를 생각할 때 참 보이는 것은 나의 죄, 죄악들 뿐이고, 죄들... 그 수많은 죄를 범하고도 지금 이 땅끝에서 아직도 이렇게 살아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과거를 기억하고도 감사하지 못하고 아직도 죄에 미련이 남아 애굽 땅을 갈망하고 있으면 어찌합니까?
주께서 왕에게 장수하게 하사 그의 나이가 여러 대에 미치게 하시리이다 (6)
다윗이 장수를 빈 것은 하나님과 함께 있기 원해서입니다.
그가 영원히 하나님 앞에서 거주하리니, 인자와 진리를 예비하사 그를 보호하소서 (7a, 7b)
그가 인자와 진리에 의한 구원으로 보호받기 원한 것도 주님을 영원히 찬송하며 주님의 뜻에 순종하길 원해서였습니다.
하나님만 사랑했습니다. 주를 위해서는 무엇이라도 약속할 수 있었고 그것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자신의 의지와 신념으로는 결코 지킬 수가 없고 자기 서원을 이행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은혜를 주셔야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이름을 영원히 찬양하며 매일 나의 서원을 이행하리이다 (8)
결국, 이때까지 주님의 도우심을 그토록 간절히 구한 이유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한 목적이고, 하나님을 위해 서원을 이행하고 싶은 소원이었던 것입니다.
이거 다 주님께서 그렇게 할 수 있도록 그의 그의 심장, 그의 머리, 그의 마음을 움직여 주신 것입니다.
저보다 높은 바위에 저를 인도하소서. 주는 저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이십니다.
제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머물며 제가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할 것입니다.
오늘 다윗의 노래처럼 우리도 언제든지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하기를 원하나 그것을 우리 힘으로 할 수 없으니 오직 주님께서 영원히 우리를 온전히 다스려주시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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