쫓기던 다윗의 무리가 블레셋의 침략을 당한 그일라 사람들을 구조했고, 곧바로 그곳을 떠나갔습니다(참. #54).
하지만 그들이 갈 수 있는 곳은 아무것도 없는 광야뿐이었습니다.
다윗의 시, 유다 광야에 있을 때에.
다윗과 함께하는, 이젠 육백여 명으로 불어난 그의 일당은 유다 광야 이곳저곳에 머물렀습니다.
사울의 군대가 그들을 매일같이 찾아다녔지만 이상하게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참. 삼상 23:14).
왜냐하면 사울은 다윗을 찾았지만 다윗은 주님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1a)
아주 기이한 일입니다. 성도는 다윗처럼 보이지도 않는 하늘만을 바라보며 간절히 주를 찾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사울처럼 눈에 불을 켜고 자기 원수를 찾아다닙니다.
불신자들은 이 땅에 살면서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것들로 만족합니다.
같은 땅에 살지만 성도는 주님을 갈망하고 앙모할 뿐입니다.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1b)
불신자들이 만족하는 그 땅은 성도에겐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일 뿐입니다.
그러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마 5:6)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קֹדֶשׁ)/코데쉬/'분리됨, 거룩함, 신성함'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2)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그때 다윗이 사울이 자기의 생명을 빼앗으려고 나온 것을 보았으므로 십 광야 수풀에 숨어있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요나단이 나타나서 수풀에 들어와 다윗에게 이르렀습니다.
그는 다윗을 위로하며 하나님을 힘 있게 의지하게 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 아버지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아버지 사울도 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여호와 앞에 언약하고 요나단은 돌아갑니다(참. 삼상 23:15-18).
희한하죠? 사울이 매일매일 수천의 군사들로 그토록 원수를 찾았건만 그의 아들 요나단은 너무도 쉽게 찾아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원수에게서 가려주시고 친히 위로와 구원이 담긴 약속의 말씀을 보내주십니다.
다윗은 여전히 광야 수풀에 머물고 있지만 그곳은 더 이상 아무 것도 없는 메마른 땅이 아니라 주의 말씀이 머무시는 성소가 되었습니다.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2)
그가 언제 주를 바라보았습니까?
자기를 찾아온 요나단을 보고는 즉시 그가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사자임을 알아챘을 것입니다.
그의 위로 가운데 주의 말씀을 발견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구약성경에 65회나 반복하신 하나님의 구원 약속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그것은 주님의 위로이자 명령입니다.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수 1:9)
예루살렘이든지 광야든지 어디든 상관이 없습니다. 원래 그랬습니다.
백성들이 성소와 성전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여 장소에 구애를 받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하나님께서는 괜찮다고, 어디에 있든 아무 문제 없이 나는 언제든 너를 찾아낼 것이며,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와 함께 있겠다고 계속해서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을 모르고 곧 죽어도 성전에 나와야만 하는 줄 알고, 우리 집엔 안 계시고 성전에만은 확실히 계실 것으로 믿고,
아니 애초에 교회 건물을 성전으로 생각하게 된 것부터가 잘못된 것인 줄도 모르고 그렇게 지내온 많은 세월이 있었습니다.
물론 예배당은 크고 아름다워 기도와 예배를 돕는 분위기를 가지고 있고, 우리가 5-6일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광야는 무미건조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어디서든 성도는 분투하며 전심전력으로 기도할 수 있고, 주님께서는 그렇게 그들이 성소로 지어져 가기를 원하십니다.
주님께서 명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그러므로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이제 메마른 광야는 성소가 되었습니다. 매인 것을 푼 후에야 비로소 바른 신앙, 참된 믿음으로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게 안 되면 주일 하루만 경건한 신앙인으로 변신하는 반쪽짜리가 되고 맙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안정된 연기력만 돋보이게 될 것입니다.
꼭 예루살렘(성전)이 아니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고, 아주 손쉽게 우리에게 찾아오시며,
그렇게 우리가 주님의 성전이 되어갑니다.
마침내 광야 같이 메마른 내 영혼이 충만한 새 생명을 얻어 주님을 바라봅니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나의 영혼(נֶפֶשׁ)/네페쉬/'숨쉬는 존재(피조물), 영혼, 생명'이 만족할 것이라 나의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3-5)
이처럼 성령이 충만하므로 좋은 음식을 먹지 않아도 실컷 먹은 것과 같이 내가 만족하게 됩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처럼(참. 단 1:15).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하오리니”(6)
"반드시 제가 침상에서 주님을 기억하고, 밤중에 주님을 묵상합니다."(직역, 6)
이제 드디어 자유롭게 이것이 되는 것입니다. 경건의 시작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자기 의지만으로 고정관념을 깨기란 참으로 쉽지가 않습니다.
새벽에 일어났으면 교회에 와서 기도하지 왜 침상에 머물러 있느냐고 불쑥불쑥 들어옵니다.
벌써 걸리는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그렇게 알고 신앙생활을 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성도가 새벽에 예배당에 갈 수 있습니까? 아니, 그걸 주님께서 원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쳐 놓은 울타리를 스스로 넘어서기가 쉽지 않죠. 하지만 주께서 해주시면, 우리는 말씀의 진리로 말미암아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
멍에를 내려놓게 되는 거죠. 사실 그런 멍에는 대부분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서 지고 있습니다.
‘내가 뭘 해야 한다. 그래야 복을 받을 수 있다.’
‘아무것도 안 하는데 무슨 복을 받겠냐?’
이런 생각들에는 중요한 한 가지가 빠져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겁게 부르리이다”(7)
주의 도우심 없이 내가 하려고 해서 복을 받겠습니까? 그저 오직 주님만이 우리의 도움이십니다.
그러면 이 광야가 주의 날개 그늘이 됩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침묵하는 비둘기의 성소가 됩니다.
우리가 거룩한 제사장 나라가 됩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뜻과 의에는 우리 주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어두운 땅 끝에까지 와서 이제는 구덩이 앞에 서 있는 신자라 할지라도 성전이 됩니다.
주님의 도우심은 사랑으로 행하시는 하나님의 행위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늘 자신의 행위만 먼저 생각합니다.
거기서 파탄이 일어납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믿기 시작하는 지점입니다.
나를 먼저 생각하니까, 내가 뭘 할 것을 먼저 생각하니까 그렇습니다.
애통하십시오. 주님의 도우심으로 내려놓을 수 있도록.
내려놓음이 경건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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