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μελετάω 조심하다 애쓰다 묵상하다/시편Ⅰ

36# 신의 산들과 깊은 물을 뒤덮은 구름과 하늘

시 36편은 악인에 대해 묘사하고(1-4), 주님의 인자하심(חֵסֵד)/헤세드/'사랑, 인애, 자비', 주님의 진실하심을 찬양합니다(5).

그다음은 주님의 의(צְדָקָה)/체다카/'공의, 의'와 주님의 심판(מִשׁפָּט)/미쉬파트/'정의, 심판, 재판'을 말하는데(6), 사실 이 단어들은 주님의 공의와 정의를 말하는 것이고, 그것들은 '주님의 의'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다시 주의 날개 그늘 아래 피하게 하시며, 주의 것으로 그분의 복락을 풍성하게 누리게 하시는 주님의 인애(חֵסֵד)/헤세드/'사랑, 인애, 자비'를 찬양합니다(7).

이어서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9)라고 고백하며

“주님을 아는 사람에게 주님의 인애를 마음이 바른 사람에게 주님의 의를 계속 베푸소서.”(10, 바른성경) 하는 기도가 나옵니다.

그것은 앞서 묘사한 그런 악인들이 내게 이르러서 나를 내쫓지 못하게 해 달라는 간구로 이어집니다.

끝으로 "악을 행하는 자들이 거기서 넘어졌으니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날 수 없으리이다."(12)라는 주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선언으로 마칩니다.

이 시편에서 가장 강조되고 있는 것은 바로 ‘주님의 의’입니다. 

 

사실 4절에 “그는 그의 침상에서 죄악을 꾀하며 스스로 악한 길에 서고 악을 거절하지 아니하는도다.” 한 것은 바로 다윗 자신에 대한 묘사입니다.

다윗은 간음한 자였으며, 살인한 자였습니다. 그의 행적이 성경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누가 봐도 그는 분명한 악인이었습니다. 의인도 아니었을뿐더러, 성격이 착한 사람도 아니었죠.

다윗이 1-4절에 악인의 행동과 그들의 마음까지도 헤아려 설명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기가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이고, 그것은 우리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선악을 정확하게 판별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이미 그런 악을 생각하고 있고, 실제로 그것을 행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내가 태어날 때부터 악하였고, 내 어머니가 잉태할 때부터 죄가 있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참. 시 51:5).

애초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것은 아담의 첫 번째 범죄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과 악을 너무나도 잘 압니다.

내 안에 악한 것을 즐기고 잘못된 길로 더 나가려는 성향이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기보다는 그 뜻에 반하는 내 이익을 위해, 또는 내가 하고 싶은 일에만 온 힘을 다하는 이기적인 습성, 그런 육신의 소욕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다윗은 주님의 종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앞의 시 35편의 마지막 부분에도 종을 언급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시 36편의 표제에도 ‘여호와의 종 다윗의 시’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의 고통과 환난과 또 종의 처지로 당한 모든 일들이 종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모습입니다.

성경은 다윗을 의인으로 높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민족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을 다윗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이 사람을 이토록 빛나게 하는 의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다윗이 누리는 모든 영광과 복락은 본래 누구의 것입니까? 당연히 그가 예표하고 있는 그리스도께로부터 나온 것이겠지요.

 

한 가지 생각해 볼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 주, 하나님의 ‘의’는 악인을 심판하여 영원한 벌에 처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이 거기서 넘어졌으니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날 수 없으리이다.”(12)라고 한 말씀이 하나님의 정의를 나타냅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거기서 넘어졌을 때 반드시 그는 다시 일어나지 못했어야만 했고, 우리도 또한 그랬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일으켜졌습니다.

무서운 심판을 내리게 하는 하나님의 의를 설명하면서 성경은 '주의 인자하심'(חֵסֵד)/헤세드/'사랑, 인애, 자비', 그 사랑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할 때에, 인자하시고 복을 주시는 생명의 원천인 주님을 아는 것의 중요성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엄중한 하나님의 의는 그보다 더 크고 놀라운 우리 주 하나님의 사랑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사실을 알려 주시려고 가장 큰 죄인이지만 그러나 주님의 종인 다윗을 통해 이 시편이 기록되게 하셨습니다.

진리는 주님의 의가 어떤 어둠보다도 크고 밝아서, 모든 사람의 죄악을 덮어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다윗과 우리를 다시 일으키는 ‘의’가 바로 다윗과 우리의 주가 되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צְדָקָה)/체다카/'공의, '입니다.

죄인 다윗과 함께 누구보다도 악한 나를 넘어진 채로 그냥 두지 않으시고 다시 일으켜 세우십니다. 우리가 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악과 허물의 어둠을 그리스도의 의의 옷으로 덮으셔서 우리를 밝게 빛나도록 하십니다.

그럴 수 있는 것은 오직 '주님의 의' 때문이며, 그 놀라운 의를 뒤덮고 있는 것은 주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그 사랑입니다. 

"주여, 주님의 인애가 하늘(שָׁמַיִם)/샤마임/'하늘들'에 있고 주님의 신실하심(אֱמוּנָה)/에무나/'신실, 진리'이 구름(שַׁחַק)/샤하크/'먼지, 구름'에 이르렀습니다. 주님의 의(공의)는 하나님(אֵל)/엘/의 산들(הָרָר)/하라르/'산, 산지, 언덕'과 같고 주님의 판결(정의)은 깊은 바다(תְּהוֹם)/테홈/'깊은 물, 바다, 깊음'와 같으니, 주여, 주께서 사람과 짐승을 보호하십니다."(5-6, 바른성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