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마 16:6)
제자들이 빵을 가져오는 것을 잊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조심하고 삼가라.”
“우리가 빵을 가져오지 않았구나.”
“믿음이 작은 자들아, 왜 빵이 없다고 서로 의논하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느냐?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너희가 몇 바구니를 모았는지 기억하지 못하느냐? 또 빵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너희가 몇 광주리를 모았는지 기억하지 못하느냐? 어찌 내가 빵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이해하지 못하느냐?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누룩(교훈, 가르침)을 경계하여라.”
그제야 그들은 예수님께서 빵의 누룩이 아니라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경계하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았다.
(마 16:5-12)
그리스도께서는 빵이 아니라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누룩, 즉 율법주의자들에게서 나오는 교훈(가르침)들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은혜의 기적을 일으키실 때 빵을 떼셔서 제자들에게 주시고 회중에게 나누어주라고만 명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리스도께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시자) 자신들이 빵을 가져오지 않은 행위를 책망하시는 줄로 오해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마음속에는 ‘기적적으로 많이 얻게 된 빵들을 자기들이 모아서 주님께 드려야겠다.’, 혹은 ‘그 모은 것들을 주님께서 기뻐하실만한 일에 어떻게 해야 하겠다.’라는 누룩이 벌써 퍼져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뜻에 정반대되는 생각들이 자라났습니다. 열두 바구니와 일곱 광주리에 찼던 것은 오직 주님의 능력과 은혜의 크심을 나타내심인데, 기적을 본 제자들은 그 은혜의 전리품들을 자기들이 모아서 간수하고 필요한 곳에 쓸 일에만 열중합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돈을 사랑하여 자신들이 공적을 ‘쌓아 올리는 일’에 몰두하던 자들이었습니다. 만일 “내가 이 자리에 설 수 있게 된 것은 어제까지 내가 어떻게 이러이러한 일들을 해왔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면 이미 그들의 누룩이 내 안에 퍼진 것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자신들이 얼만큼이나 모았는지에 더욱 큰 관심을 가지므로, 주님 아닌 인간의 가르침(교훈)을 나누어주면서, 주님께서 명하지도 않으신 바구니와 봉투들을 최대한 양껏 많이 담을 수 있도록 구비해 놓습니다.
그 곳 이름을 기브롯 핫다아와라 불렀으니 욕심을 낸 백성을 거기 장사함이었더라 (민 11:34)
그리스도인에게는 ‘쌓는 것’이 없습니다. 주님을 사모하여 날마다 죽습니다. 어제까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교만한 것들이 없어 가난한 그 심령으로 매일같이 엎드려 주님께 은혜를 구하고, 언제나 주님께로부터 흘러나오는 은혜로 살아갑니다.
백성이 종일토록 열심히 메추라기를 모아서 적게 모은 자도 열 호멜이라 진영 사면에 펴 두었고,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진노하셔서 심히 큰 재앙으로 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민 11장). 기도는 쌓이지 않습니다. 은혜도 내일의 분량까지 쌓아지지 않습니다. 날마다 새로이 처음을 맞이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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