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십시오. 이 여러 해 동안 제가 아버지를 섬기고 아버지의 명령을 결코 어긴 적이 없었는데, 제게는 제 친구들과 함께 즐기도록 새끼 염소 한 마리도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아버지의 이 아들이 돌아오자 그를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눅 15:29-30)
큰아들은 작은아들이 아버지 재산을 창녀들과 함께 방탕하게 허비해서 아버지와의 관계가 끊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돈을 허비하는 것이 꼭 부도덕하고 성적으로 문란한 생활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살다 보면 돈은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겠지요?
그런데 지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단지 재물을 허비하고 낭비했다는 말씀을 듣고서 성적으로 문란한 생활을 상상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저 이스라엘의 선생들은 모든 세리와 죄인들을 그것과 똑같은 시선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비유로 말씀하심으로써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이방인들을 낭비적이고 무절제하고 방탕하고 음란한 악인으로 대하는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자세를 드러내고 계신 것입니다.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땅에서 세리와 이방인들은 대개 유대인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일에 종사하며 그들의 치열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비유에서는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그 작은아들이 유대인이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돼지 치는 일을 하게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랍비로 존경받고 있던 바리새인들은 이스라엘에 율법을 가르치면서 돼지고기를 먹는 것과 돼지를 사육하는 일을 금해왔습니다. 분명히 율법에 부정하다고 명시되어 있고 먹든지 만지든지 다 죽을 것이라고 되어 있으니까요(레 11:7; 신 14:8; 사 65:4, 66:17).
만일 하나님의 율법을 예수 그리스도로 아는 지식이 없다면 저들과 똑같이 아버지의 사랑을 오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니라 (요일 4:8b)
둘째 아들을 너무나 사랑하셨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아들은 아버지가 싫다면서 먼 나라로 떠나 버렸습니다.
이 아들은 죄인입니다. 그렇지만 설사 그 먼 데 살면서 법을 어기고 여러 가지 죄들을 더하고, 그래서 한참을 고생하면서 본향의 아버지 집을 그리워하다가/ 결국 회개하고 돌아온다면, 아버지는 그 아들을 버리시겠습니까?
멀리서 보고 달려오실 것입니다. 죽은 아들이 다시 살아난 것처럼 기뻐하시면서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 만찬을 베푸시고 영원히 함께 사실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자신들이 비유 속에 등장하는 큰아들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정확히 그들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저 율법 선생들은 이스라엘이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세상에 속하여 그들을 사랑하지만, 아버지께서는 아무런 조건 없이 이 죄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아무쪼록 여러분, 롬 10:1-4 말씀과 같이 제 마음의 소원과 주의 자녀들을 위해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 역시 여러분이 구함을 받는 것입니다.
저 비유를 듣고 있는 율법 가르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비록 하나님께 열심은 있으나, 그것은 지식(믿음)을 따른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한 체, 자기들 자신의 의를 세우려고 힘을 쓰지만/ 하나님의 의에 순종하지는 않았습니다.
모세는 율법을 의지하고 지키는 사람은 그것을 완전히 지켜야만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했지만(이는 참된 말씀이다), 그러나 아무도 그렇게 할 수는 없고(모세 본인도 못함),
따라서 그렇게 행하고 가르치려다가는 비유에 나오는 큰아들처럼 자기 죄악에다가 스스로 의인인 척하는 위선의 죄악을 더할 것입니다.
큰아들은 여러 해 동안 아버지의 명령을 어긴 적이 결코 없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실상은 단지 아버지 재산을 목적으로 행한 행위들을 가지고 스스로 의롭다 하며 자기를 내세우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와 형제는 사랑하지 않고 그저 아버지께 받은 재산과 앞으로 받게 될 재물들을 원했을 뿐입니다.
그랬는데 이제 와서 아버지는 재물이 아닌 사랑을 말씀하시자 아버지께 화를 내며 불순종합니다.
결국 율법의 목적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르쳐 주시는 데 있었지만/ 큰아들은 결국 그 새 가르침을 거부하고 아버지 집에서 베풀어진 잔치에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τέλος γὰρ νόμου Χριστὸς εἰς δικαιοσύνην παντὶ τῷ πιστεύοντι. 참으로 율법의 마침(τέλος)/텔로스/'끝, 종결, 마침'이 되신 그리스도께서 모든 믿는 이에게 의가 되셨습니다. (롬 10:4)
결국 이 비유를 통해 모든 죄인에게 주시는 가르침은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택자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율법을 예수님께서 영단번에 완전히 이루셨으므로 그 행하심으로써
세상에서 구원과 많은 복을 받기 위해 율법을 지키고자 하는 인간적인 노력과 행위를 끝마치게 하셨습니다.
율법이 아니라 오로지 그리스도만이 모든 신자들에게 규례와 규범과 규칙들과 법도가 되신다는 의미입니다.
언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신 것은 결코 신자들에게서 나온 행위가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의 의이며,
그 목적은 그리스도의 의를 드러내시고 그것을 통해서 주께서 사랑하시는 각각의 모든 자녀가 아버지께 의롭다 하심을 받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사랑의 무조건적인 은혜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보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 안에 거하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살고, 하나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거하십니다. (요일 4:16)
'μελετάω 조심하다 애쓰다 묵상하다 > 누가복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은혜와 위로가 필요한 사람 (1) | 2024.09.28 |
---|---|
주님의 능력 (눅 24:25-35) (0) | 2023.04.08 |
하나님의 나라를 보는 사람들 (0) | 2020.09.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