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μελετάω 조심하다 애쓰다 묵상하다/누가복음

주님의 능력 (눅 24:25-35)

오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 곧 글로바와 무명의 한 제자는 예루살렘에서 11킬로 떨어진 엠마오로 가면서 토론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신 예수님께서는 금요일 낮에 숨지셨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여전히 메시야 곧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속하시리라는 소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토요일에는 구약성경이 요구하는 안식을 주님께서 완전히 이루셨고, 일요일 새벽에 살아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새벽에 무덤에서 예수님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울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셨습니다(막 16:9). 

그녀는 놀랍고 기쁜 마음에 한걸음에 다른 제자들에게로 달려가서 부활의 복음을 전합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요 20:18)

 

하지만 제자들은 그녀의 말을 믿지 못했습니다. 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않았다고 했지요.

그리고 23절, 그날 오후 주님께서는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고, 구약성경 전체에서 예수님에 관한 내용을 풀어주셨습니다.

저녁에는 함께 식사를 나누시면서 그들의 눈을 열어주셨습니다. 

이제 그 두 제자는 주님께서 자신들에게 보이신 사실을 전하기 위해,

저녁이 훌쩍 지난 시각에 다시 11킬로를 걸어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33절 하반절부터 보시면, 거기에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었는데,

그들이 말하기를 주님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언제 보이셨을까요? 

 

빈 무덤에서 세마포를 본 베드로는 그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는 생각을 거듭하지요. 

무덤 안에 주님의 시신은 보이지 않고 세마포만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은 일단 누군가 주님의 시신을 훔쳐간 것이 아님을 뜻합니다.

세마포는 시체를 쌌던 옷이죠. 만일 예수님의 시체를 옮기려 했다면 그것을 벗겨놓고 옮기려 했을 리 없습니다.

누가 시체를 나체로 운반하려고 하겠습니까? 그러니 이는 주님께서 스스로 일어나셨다는 얘기가 됩니다. 

더 생각합니다. ‘그럼 진짜로 부활하셨을까? 아까 분명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을 뵈었다고 했는데…’ 

만일 주님께서 정말로 부활하셨다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는데 그보다 더 큰 증거가 어디 있겠습니까?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눅 3:22)

 

세례를 받으실 때에 성령 하나님께서 강림하시고 하늘로부터 들려온 말씀입니다.

그런데요, 언젠가 또 그 말씀을 들려온 때가 있었습니다. 높은 산에서...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마 17:5)

 

바로 그때 광채와 위엄 있는 소리에 압도된 가운데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앞에 예수님께서 변모하신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그것은 벌써 몇 달 전 일입니다.

그 주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게 된 제자들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아마도 저 막달라 마리아와 엠마오의 두 제자들과 똑같이 놀라움과 기쁨과 환희에 차서 빨리 다른 제자들에게 말해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무엇을 본 줄 아십니까? 누구를 만난 줄 아십니까? 우리 주님께서 갑자기 변화된 모습으로 보이셨습니다. 모세와 엘리야 선지자도 보았습니다. 참으로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고, 참으로 우리 주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외치고 싶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그날 주님께서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 한 가지를 명하십니다.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마 17:9)

그들이 본 모습은 믿음이 없이는 결코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부활 신앙이 없으면 그것은 그저 세상에서 신기한 구경거리가 될 뿐입니다. 

그날에 베드로는 함께 있던 야고보와 요한과 마찬가지로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 (막 9:10) 하며 서로 문의했습니다.

아직 깨달음을 얻기 전이라 알 수가 없었죠. 

하지만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난 오늘 생각해보니 부활하신 몸으로 나타나신 예수님을 자기는 그때 이미 뵌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베드로는 깨달았습니다.

몇 달 전 그 산에서 보이신 주님께서 사실은 오늘 새벽에 부활하셔서 변모하신 모습으로 막달라 마리아와 엠마오의 두 제자들에게 보이신 바로 그 주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신의 권능으로 부활하신 후에 서로 다른 시공간에 보이셨습니다.

부활하신 그 신성한 영광스러운 몸을 변화산에서 미리 보이셨던 것입니다. 

이 깨달음으로 인한 감격을 훗날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아 기록으로 남기게 됩니다. 베드로가 쓴 벧후 1:17-18입니다.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

 

이 거룩한 산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신령한 몸을 뵈었던 바로 그 산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부활체로 변모하신 것은 아버지 하나님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눅 22:20에 사람의 몸으로 마지막 만찬을 나누실 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예수님께서 나무에 달려 죽으심은 주께서 직접 자신의 피로 주의 백성들을 위해 다시 새롭게 맺으시는 새 언약의 피라는 말씀입니다.

그 십자가 보혈로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렘 31:34) 하신 말씀도 이루십니다.

엠마오 도상에서도 성경을 풀어주실 때 십자가 죽음으로 이루신 대속과 사망 권세 이기신 부활의 의미를 알려 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녁에 함께 만찬을 나누실 때 눈을 열어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어디서 주님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 죄를 사하셔서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시려고 주께서 나무에 달려 숨지시고 부활하실 것이라는 예언이 구약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 바로 그 주님께서 그 약속들을 실제로 그대로 다 이루셨다.’ 

이 믿음 안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납니다.

갈 2:20의 말씀대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오직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말씀이 인도하심을 따라 삽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믿음, 바로 나를 위해 저주의 형벌을 감당하셨고,

그러나 사망 권세를 이기셔서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은 부활의 능력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 슬픔과 사망의 땅 위에서도 하나님 나라 백성의 기쁨과 부활 생명 주님의 능력을 바라봅니다.

놀라우신 부활의 능력과 영광이 우리 주님께 영원토록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 11:2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