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μελετάω 조심하다 애쓰다 묵상하다/시편Ⅱ

#53 어리석은 자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그들은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시 53:1)

여기서 어리석은(נָבָל)/나발/'어리석은, 분별없는' 자는 악인을 가리킵니다. 어리석다는 것은 무식하다는 말인데요, 어째서 악인이 무식할까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니 무식한 것입니다. 세상 지식이 아니고 하나님을 아느냐 모르느냐? 이것이 선악을 분별하는 기준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으면 신자이므로 의인으로 여김을 받고, 하나님을 모르면 어리석은 자며 악인입니다.

왜 세상 사람들이 어리석게도 하나님을 알지 못할까요?

그 이유는 그들이 눈으로 보려고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보이지가 않으니 하나님을 무시하고 가증한 악을 행합니다.

반면에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까?

믿음은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인쳐주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입니다(참. 빌 3:8). 

하나님께서 주신 그 차원 높은 지식이 있기에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예정과 섭리로 이 땅을 다스리시고 계신 사실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기억하시고 사랑으로 굽어살피십니다.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렇게 하시는 일은 본질적으로 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십니다.

우리는 그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실제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온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겉모습을 보고 교회를 판단합니다. 우리도 그러면 다 같이 파멸의 구덩이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세상의 고급스럽고 아름다운 모습에 심취하여 외양만 그렇게 꾸미려고 하다 보면 교회 안에 세속주의가 침투해 들어오고 맙니다.

 

그런데 한 가지 큰 문제가 있습니다. 이미 시온(교회)이 바벨론(세상)에 먹힌 것입니다. 지배당하고 있습니다.

“시온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줄 자 누구인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며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시 53:6)

지금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고 있는 성도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죄악이 그런 비참한 상황에 놓인 원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돌이키십니다. 사람은 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성도들을 구원해서 고향으로 데려오시는 일(행위)을 하실 수가 있습니다.

사람의 행위로는 결코 구원에 이를 수가 없는 것이죠. 죄인을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 오직 하나님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아직도 하나님의 백성이 바벨론의 포로로 살고 있는지, 시 14편이 왜 또 53편에 나오고 있는 건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5절만 다름).

하나님께서 그들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며 이스라엘이 기뻐할 것이라는 말씀에 힌트가 있습니다.

야곱은 죄인을 가리키고, 이스라엘은 성도를 가리키죠. 하나님께서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어주신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야곱과 이스라엘은 정확히 동일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한 사람입니다.

물론 문학적으로는 히브리 시의 법칙에 따르기 때문에 동일한 뜻을 가진 두 단어를 배치했다고 보이지만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야곱인 동시에 이스라엘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인인 동시에 성도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택하신 백성 가운데도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믿음으로 행하지 못하고 죄를 범하는 이들이 많고,

또 하나님을 안다고 자기는 생각하면서도 실제로는 진짜로 믿지는 못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고,

또한, 믿는다고 말은 해도 믿음으로 행하지 못하는 이들도 많이 있는 것입니다.

제 얘기입니다. 그래서 저는 죄인인 동시에 성도입니다.

실제로 온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신데도 하나님을 진짜로 믿는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믿어야겠다고 마음먹는다고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사람의 의지랑은 관계가 없습니다.

흰색을 보고 '이제부터 저건 파란색이라고 믿어야지'라고 생각하면 정말로 믿어질까요?

파란색이라고 말은 할 수 있어도 실제로는 흰색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이 없습니다. 겸손하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로 믿음이 없습니다.

제자들이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지 못하고 데려오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막 9:19-24).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예수님께서 그 아이의 아버지에게 물으셨습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어릴 때부터니이다.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우리가 죄악에 속박당했습니다.

그리고는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이러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 없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그러자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그러니 우리가 믿음을 구해야 하죠.

"내가 믿습니다"라고 했는데 그것은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개혁주의구원론' 5.)

땅에 있는 동안에는 우리는 성도인 동시에 죄인입니다. 내가 입으로는 믿는다고 하지만 항상 행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런 연약한 우리를 위해 여러 시편 말씀으로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성도의 기도를 보여주십니다.

오로지 주님께 의지해야만 세상에 사로잡힌 나를 주께서 건져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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