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여 주의 노하심으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고 주의 분노하심으로 나를 징계하지 마소서
주의 화살이 나를 찌르고 주의 손이 나를 심히 누르시나이다.
주의 진노로 말미암아 내 살에 성한 곳이 없사오며 나의 죄로 말미암아 내 뼈에 평안함이 없나이다.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내가 감당할 수 없나이다.
내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나오니 내가 우매한 까닭이로소이다.
내가 아프고 심히 구부러졌으며 종일토록 슬픔 중에 다니나이다.
내 허리에 열기가 가득하고 내 살에 성한 곳이 없나이다.
내가 피곤하고 심히 상하였으매 마음이 불안하여 신음하나이다.
주여 나의 모든 소원이 주 앞에 있사오며 나의 탄식이 주 앞에 감추이지 아니하나이다.
내 심장이 뛰고 내 기력이 쇠하여 내 눈의 빛도 나를 떠났나이다.
내가 사랑하는 자와 내 친구들이 내 상처를 멀리하고 내 친척들도 멀리 섰나이다.
내 생명을 찾는 자가 올무를 놓고 나를 해하려는 자가 괴악한 일을 말하여 종일토록 음모를 꾸미오나
나는 못 듣는 자 같이 듣지 아니하고 말 못하는 자 같이 입을 열지 아니하오니
나는 듣지 못하는 자 같아서 내 입에는 반박할 말이 없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를 바랐사오니
내 주 하나님이 내게 응답하시리이다.
내가 말하기를 두렵건대 그들이 나 때문에 기뻐하며 내가 실족할 때에 나를 향하여 스스로 교만할까 하였나이다.
내가 넘어지게 되었고 나의 근심이 항상 내 앞에 있사오니 내 죄악을 아뢰고 내 죄를 슬퍼함이니이다.
내 원수가 활발하며 강하고 부당하게 나를 미워하는 자가 많으며
또 악으로 선을 대신하는 자들이 내가 선을 따른다는 것 때문에 나를 대적하나이다.
여호와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
속히 나를 도우소서.
주 나의 구원이시여.
(시 38:1-22)
시 38편의 표제는 [다윗의 기념(זָכַר)/자카르/'기억하다, 상기하다'하는 시]입니다. 무엇을 기억합니까?
속죄제와 희생제물을 기억합니다. 이 시편은 참으로 우리 죄악들을 기억하고, 회개의 마음을 기념하게 만듭니다. 다시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게 합니다.
그러나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습니다.
벌써 오래전 은혜로 죄와 사망 가운데서 구원을 받았다는 확신을 가졌고 변화를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렀는데도 변한 것이 없습니다.
믿음이 자라기는커녕 위태로운 영혼은 어두운 세상으로 침잠해 갑니다.
계획하는 일은 선한 것 하나 없고 생각과 행위들은 온통 악한 마음에서 나옵니다.
수많은 죄악이 내 안에서 커져만 가고 있지만 겉으로는 항시 가식적인 미소를 띠고 위선을 떠는 것입니다.
도대체 감히 예수님의 십자가를 좇는다고 말씀드리기도 민망합니다.
예배당에서도 남에게 드러내려 하지 않는 그런 제대로 된 믿음은 보이지 않습니다.
어떤 마음과 행위에서도 성화된 증거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입술로 거룩을 말하면서 그 속은 어둡기만 합니다.
그래도 시간은 흐르니까.. 지금도 성화의 과정에 있는 것이라는 배움도 사실 지금의 제게는 큰 위안이 되지는 않습니다.
내 삶의 어두운 곳곳에서 드러나는 추악한 모습들은 더이상 비대한 몸을 숨길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고
참으로 나를 둘러싼 강력한 악과 죄들 때문에 저주가 내게 임하였으나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지금에 와서는 그것들이 머리털보다도 많아져서 내 마음마저 나를 떠나버리려 합니다.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나 생각해보니 두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 나의 죄악들 때문입니다.
이제까지도 땅에 누워 게으르고 방탕하며 나태하게 시간을 때우고만 있는 죄입니다.
크고 놀라운 은혜의 구원을 받았다면 담대하게 내 죄악에 대한 형벌인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라야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주님께서 지고 따르라 하신 나의 십자가는 절대로 짊어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잘 안 보이는 곳에 잘 숨겨 놓고 그저 가끔씩 혹시 없어지진 않았는지 들춰보기만 했습니다.
그러니 때가 차서 주님께서 오시면 이런 어처구니 없는 말밖에 저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 보십시오. 당신께서 주신 한 므나를 이렇게 수건에 잘 싸서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정말로 당신을 두려워했습니다.
여태 보인 모습이 이러면서 무슨 변명을 할 수 있을까요? 나는 더러운 죄인이고 악한 종일 뿐입니다.
또 하나는 나의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내 십자가가 무엇인지 어떤 의미인지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마 16:24)
그런데 내 십자가는 무엇일까? 왜 그것을 지고 따라오라고 하셨을까? 깊이 묵상하지 않고 막연하게 이 길 위에서 달콤한 구원을 맛보는 삶을 누리겠거니 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내 십자가는 이 저주받은 땅 위에서 범했고 지금도 저지르고 앞으로 행하여질 나의 수많은 죄악들로 인한 저주가 담긴 나무입니다.
그 길의 끝에서 걸음을 멈추게 될 때는 지고 있던 바로 그 십자가에 달리는 처형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내가 등에 짊어져야 할 이 무거운 나무는 나를 매달기 위한 형구였던 것입니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신 21:23b)
여태껏 나무 무게만 생각해서 짊어지길 꺼렸을 뿐 그것이 무엇이며 어디에 쓰이게 될 것인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되었다. 내 십자가 지는 것도 너무 힘들다. 이대로는 못 살겠다.
이 자리에 서서 더이상 못 하겠다 하려고 앞에서 가시는 주님을 찾았습니다.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 3:13)
절대로 안 됩니다 주님! 그런 일이 결코 있어서는 안 됩니다!
어리석음이 이러합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제가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걱정하기라도 했지 저는 제 안위만 염려하니 어찌나 한심한지 눈물이 날 지경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벧전 3:18a)
의인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불의한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고난을 겪으심은
죄 때문에 반드시 죽을 우리를 다시 일으키시고 살리시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다고 알려주심은 우리에게도 부활과 영생의 선물이 주어진다는 복된 음성이었습니다.
앞서 가신 주님께서 계신 곳은 무시무시한 처형장이 아닌 주의 영광이 뒤덮인 하늘이었습니다.
당연히 멸망 받아 마땅한 이 죄인에게는 너무나도 큰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주께서 불의한 내 대신 목숨을 내놓으셨으니 나는 내 저주의 나무를 짊어지고서 그분만 따라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 길의 종착지가 바로 예수님께서 계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면 당연히 그분과 같이 있게 되지 않겠습니까?
이제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저주의 나무를 매고 주님께 달려가는 장면을 꿈꿉니다.
비록 나의 현실을 어둡게 하는 범죄들과 우매함이지만,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주께서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에게 비추어 주십니다(고후 4:6).
주님, 저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주님 안으로 우리 영혼이 피하오니
파멸이 지나갈 때까지 주님의 날개 그늘 속에 저희가 피할 것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곧 제게 완전하게 행하시는 주께 부르짖으니
우리 주 하나님께서 그의 인애와 진리를 우리에게도 보내주실 것입니다.
(시 5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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