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 아무개 2020. 4. 8. 14:31

그러면 이제 본격적으로 생각해 볼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정말 우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것이 우리의 행위에 관계 없이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만 된다면 그냥 우리는 우리 좋을대로 살아도 되지 않나?'

'나는 은혜로 말미암아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구원을 얻었다. 그러니 만일 내가 다시 죄를 범해도 다시금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내가 더 범죄하면 은혜도 더욱 많아지니까 계속해서 죄를 지어도 되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들이죠. 값없이 은혜로 칭의를 얻는다는 교리가 사람들을 부추겨 도덕성을 훼손하고 더 범죄를 조장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그리스도인의 성화에 관한 롬 6장 말씀을 통해 이 부분에 대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불경건한 죄인들을 의롭다고 여겨 주십니다. 그렇게 하시기를 기뻐하시지요. 이 죄인들을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하나님의 행위는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으로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은혜가 더하게 하려고 죄 속에 계속 머무르자고 하겠습니까? (직. 롬 6:1)

'죄인인 우리가 그 크신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더욱 죄악 가운데 거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바울 사도가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직. 6:2a)라고 했는데요. 여기서 그가 부정한 것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는 말씀이 아니고, 그렇게 말하면 사람들이 죄를 더 짓지 않겠느냐는 위의 부당한 추론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떻게 그 속에서 계속 살겠습니까? (직. 롬 6:2b)

여러분,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은혜의 칭의 교리(교의)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 교리와 그리스도인에 대해서 완전히 오해하고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은 죄에 대한 죽음에서 시작됩니다. 

"οἵτινες ἀπεθάνομεν" 우리는 죽었다. (롬 6:2b)

ἀπεθάνομεν/아페다노멘/은 ἀποθνήσκω/아포드네스코/'죽다'의 부정과거 동사입니다. 이 시제는 과거의 일이 거기서 끝나서 그 동작이 현재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상태를 나타내죠.

그러니 자유롭게 계속해서 죄 안에 거해도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하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은 죄에 대해서 이미 죽었는데(과거에 끝난 사실), 어떻게 현재와 미래에도 죄악 속에서 계속해서 살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죄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그러나 죄는 아직도 우리 안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이 모순적인 상태는 죄에 대한 죽음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만듭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3)

세례는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과 합하여 받는 세례입니다(참. 3-5). 특히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죄에 대한 죽으심'이었습니다(10). 

롬 6:6을 보십시오. 구원의 의미를 말해주기 위해 이전의 모습을 말씀하는데요.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6)

τοῦτο γινώσκοντες 우리가 이것을 알아야 한다.

ὅτι ὁ παλαιὸς ἡμῶν ἄνθρωπος συνεσταυρώθη, 우리의 옛 사람이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ἵνα καταργηθῇ τὸ σῶμα τῆς ἁμαρτίας, 죄의 몸을 폐하기 위해서이고,

τοῦ μηκέτι δουλεύειν ἡμᾶς τῇ ἁμαρτίᾳ. 더 이상 우리가 죄의 종노릇 하지 않기 위함이다.

바울 사도는 인류를 둘로 나누는데 바로 옛 사람과 새 사람입니다.

구원받기 이전의 옛 사람은 죄의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그것을 죄의 몸을 가진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그 상태에선 무엇을 하든지 간에 죄를 짓는 결과가 됩니다. 죄가 몸을 다스리므로 몸이 죄를 짓습니다. 죄에게 종살이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구원받은 이후의 새 사람은 새 생명 속에서 살게 됩니다(참. 4). 새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다시 살 수 없도록 극형에 처해진 것이고, 또한 위조할 수 없게 공개적으로 처형된 것입니다. 새 사람은 죄의 몸이 멸절되어 더 이상 죄에게 종살이를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위 구절만을 보면 새 사람은 마치 몸이 죄에 반응하지 않고, 전혀 죄의 미혹을 따르지 않으며, 죄로부터 완전한 해방을 얻어 거룩한 몸이 된 것으로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부터가 정말 중요합니다.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10)

여기서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셨다'(10)는 것은 그러나 위의 의미로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해 죽으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이전이나 이후에나 죄가 전혀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때 이후로는 죄에 대해 반응하지 않고 죄를 짓지 않게 되셨다는 신성모독적인 의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뭔가 다른 뜻이겠지요. 그렇다면 우리의, 죄에 대한 죽음은 어떨까요?

그것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저 6절 한 문장만 보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문맥 안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전체 성경은 우리의 죄악된 본성이 여전히 남아 있고 그것은 거듭난 신자들에게도 마찬가지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래의 12-13절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12-13)

만일 죄에 대해서 죽은 우리가 그래서 이제는 죄에 미혹될 수 없는 몸이 되었고 죄에 반응조차 하지 않게 되었다면 바울 사도가 이런 권고와 당부를 할 필요도 없습니다.

새 사람이 된 우리는 과연 죄악에 대한 경향마저 제거된 사람들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죄의 유혹은 우리 외부에 있는 세상, 마귀, 다른 육신들에서만이 아니라 여전히 우리 안으로부터 끊임없이 나옵니다.

더군다나 바울 사도가 말하는 은혜로 주어진 '새 생명'(4)은 소수의 훌륭한 신앙인들만이 가진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다 새 생명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참. 2-3).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죄에 대해서 죽었고, 죽은 자들은 죄로부터 의롭게 된 것입니다(7).

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죄를 지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습니다. 말하자면 죄 짓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아니고 죄 지음에 대한 도의적인 부당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일순간이라도 죄 가운데서 살 수 있겠느냐?'라는 것이지요. 

모든 신자들은 죄의 몸이 폐한 바 되었습니다(6). 이미 멸절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몸이 죄에 반응하지 않고, 죄가 기회를 엿보지만 몸을 죄를 위해 사용하지 않게 되고, 우리 안에서 죄가 활동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죄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하지만 죄는 아직도 우리 안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타락하고 부패한 본성은 여전히 살아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노아도, 욥도, 모세도, 다윗도, 바울도 그랬습니다. 이들을 예로 든 것은 그들이 아무리 훌륭한 신자였을지라도 성경에는 그들 자신의 여러 죄악들이 적나라하게 폭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인물들은 말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저 위대한 신앙인들과 같은 믿음을 소유한 우리 역시, 지금도 언제나 성경 말씀을 통해 죄의 욕망에 따르지 말라는 권고를 받고 있으며, 그렇게 아직도 죄의 경향을 가진 우리를 온전히 다스리시기 위해서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임하여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스스로를 죄의 몸이 죽어 죄에 대해 무감각해져서 죄를 지을 수 없다는 의미로써 거룩한 새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