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 아무개 2020. 1. 25. 02:16

#51-3 보이지 않는 것(시 51:16-19)

16 주께서는 제사(זֶבַח)/제바흐/‘희생제물’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עֹלָה)/올라/‘올림제물,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שָׁבַר)/샤바르/‘깨뜨리다, 부수다, 산산조각내다’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דָּכָה)/다카/'뭉개지다, 부숴지다, 죄를 깊이 뉘우치다'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18 주의 은택(רָצוֹן)/라촌/‘호의, 은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חוֹמָה)/호마/'(성)벽, 담'을 쌓으소서(בָּנָה)/바나/‘세우다, 짓다’

19 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그 때에 그들이 수소를 주의 제단에 드리리이다


"주께서는 제가 드리는 희생제물을 기쁘게 받지 않으시며, 주께서는 올림제물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희생제물들은 상한 심령이니, 하나님은 깨지고 부서진 마음을 멸시하지 아니하십니다. 주님의 은총으로 시온에 선을 베푸시고, 예루살렘 성벽들을 지으십시오. 그때에 주께서 의의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제물을 기뻐하실 것이니, 그때 그들이 수소들을 주님의 제단 위에 올려드릴 것입니다."(시 51:16-19, 직역성경)


이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사와 번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물을 드려야 하겠지요?

핵심은 보이는 물질들이 형태나 총합에서, 그 물질의 양과 질(눈에 보이는)의 어떠함으로써 하나님을 만족시켜 드릴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제사에는 제물이 드려집니다. 그렇다면 인류 역사상 최초로 예배의 형태가 나타난 것은 가인과 아벨의 시대입니다. 

그때 그들은 동등한 자격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가인과 그의 제물은 눈여겨보지 않으셨습니다. 

가인의 열매가 아벨의 어린 양보다 나쁜 제물이어서가 아닙니다. 가인의 제물이 아니고, 가인과 그의 제물입니다(창 4:5a).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십니다(참. 눅 20:21).

그렇다면 그의 내면에 문제가 있었겠지요.

"πνεῦμα ὁ θεός, καὶ τοὺς προσκυνοῦντας αὐτὸν ἐν πνεύματι καὶ ἀληθείᾳ δεῖ προσκυνεῖν."(요 4:24)

“하나님(θεός)은 영(πνεῦμα)/프뉴마/'바람, 호흡, 생명, 영, 성령'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성령 하나님)과 진리(ἀλήθεια)/알레데이아/(말씀이신 하나님)로(ἔν)/엔/'~안에, ~에, 위에, ~와 함께' 예배할지니라”(요 4:24)

신자는 그의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과 함께 진리의 말씀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이시니 인간의 영혼의 가장 고귀한 것을 원하시는데,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범죄하였다고 하는 자각과 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이 땅에 악인들의 악행을 허용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악행들 때문에 우리가 힘없이 고통을 받을 때,

또 그 가운데서 자기의 죄악된 모습들을 여실히, 그 벌거벗은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어 마주치는 그때,

내가 무너져 무릎 꿇고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보이며, 그 깨지고 부서진 그 자아로 올리는 희생제물과 번제물을 주께서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이시므로 주께서 원하시는 예물은 눈에 보이는 것들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돌처럼 굳어진 마음이 부서져서 가루가 될 때 하늘에 올려지는 그것이 유일하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물입니다.

나의 자아가 깨지고 부서진다는 말은 나의 죄악이 그렇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럼 우리의 죄악이 무너진 그 자리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오로지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그들의 부서진 마음을 소생시키시고,

자발적으로 선을 향하는 고상한 마음을 가진 새로운 영으로 지으십니다. 자원하는 심령’(시 51:12)이 되게 하시는 거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영혼들을 지어가시는 그 일이 예루살렘 성벽들이 지어지는 것으로, 우리가 가진 성경에서는 예루살렘 성을 쌓으시는 일로 그려졌습니다(18).

그 성은 하나님께서 뜻하신 하나님의 도성입니다. 이 땅 위에 세워진 예수님의 몸(성도/교회)입니다.

예수님의 몸 안에서 지어져가는 거듭난 신자들의 영혼과, 죄악들에 대한 고백과,

하나님의 의를 간구하는 그 간절한 소망만이 의로운 희생제물이 되고, 그것만이 온전한 올림제물들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 안에서 온전히 나의 죽음을 선포하는 일입니다. 

주께서 그것을 받으심으로써 내가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었음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나와, 내가 가진 내 안의 죄를 동일시하여 내가 부수어지므로 나의 죄악들도 깨집니다.

이런 신앙의 고백 가운데 그리스도 안에서 옥합을 깨뜨리듯이 자기 자신을 깨뜨리는 사람들만이

주님의 제단 위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그런 수소들을 올려드릴 수가 있습니다.

그 수소들은 바로 우리의 상한 심령입니다.

의 죄악이 무너지고 내가 바닥까지 낮아지고 그 자리에 다시 성벽을 쌓으십니다. 성도(교회)를 세워가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갑니다(2:22).

 

그러므로 본문은 하나님께서 지으시는 도성이 무엇인지를 마치 눈으로 보듯이 아주 선명하게 보여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옛날 구약시대에 희생제물과, 다 태워서 드리는 번제가 드려지는 제사제도를 제정하셨던 이유에 대해서 명확하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처음에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시편 말씀의 핵심은 보이는 물질의 형태나 총합, 즉 그 물질의 양이나 외양적인 질의 어떠함으로써 하나님을 만족시켜 드릴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많이 드리라고 하신 적은 없고, 다만 마음을 다해 동전 두 개 생활비 전부를 드린 가난한 과부를 칭찬하셨을 뿐입니다.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눅 21:3)

곧이어 사람들이 아름다운 돌들과 헌물로 꾸며진 성전을 보며 말하고(눅 21:5),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마 24:1)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마 24:2; 막 13:2; 눅 21:6)

사람들은 성전 건물을 보고 거기에 주님의 영광이 있을 것이라 착각합니다.

그러나 이미 그곳은 장사하는 곳이 되어 있었습니다(참. 2장)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제물로 사용될)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그러자 성전에 있던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뭐라고 했습니까? 눈에 보이는 표적을 구했습니다.

당신이 이 일들을 행하는데, 우리에게 무슨 표적을 보여 주겠는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만일 사업하듯이 교회의 일을 하면 세상일 망하듯 거기도 망해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장사하는 집은 없어질 날이 반드시 오지만 교회는 영원합니다.

내가 기쁨으로 그들에게 복을 주되 분명히 나의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32:41) 

보이지 않는 주께서 기쁨으로 주님의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교회를, 우리를 이 땅에 심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사랑에 보응하여 할 일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결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물질을 드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온 천지만물의 주인이신데 돈이 더 필요하시겠습니까?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신 4:29; 10:12)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신 6:5)

마음과 뜻을 바쳐서(대상 22:19)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막 12:30; 눅 10:27)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를 찾으라. 

우리의 신앙생활이 물질적인 보이는 것들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본질적인 것에 초점이 맞추어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