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 아무개 2020. 1. 13. 14:17

오 하나님, 우리 조상들이 주께서 그들의 때 곧 옛 시대에 행하신 일을 우리에게 일러 주었고 우리가 우리 귀로 들었나이다.

주께서 주의 손으로 이교도들을 몰아내시고 그들을 심으셨으며 주께서 그 백성들을 괴롭게 하시고 그들을 내쫓으셨나이다.

그들이 자기들의 칼로 그 땅을 얻어 소유하지도 아니하였고 그들의 팔이 그들을 구원하지도 아니하였으며,

오직 주께서 그들에게 은총을 베푸셨으므로 주의 오른손과 주의 팔과 주의 얼굴빛이 그리하셨나이다.

(시 44:1-3, 흠정역)

옛날에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점령하였는데, 사실은 그 일을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지금까지 이루어진 일들이 보기에는 우리가 한 것 같지만 사실은 주님께서 다 하셨습니다.

주께서 권능의 오른손과 팔과 얼굴의 빛을 교회에게 비추시는 이유는 교회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구성원들의 의로 인한 것이 아니고께서 기쁜 마음으로 은총을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제 생각이 아니고 성경에 그렇게 써 있습니다.

 

네가 가서 그들의 땅을 소유하는 것은 네 의나 네 마음의 곧바름 때문이 아니요,

오직 이 민족들의 사악함으로 인하여 주 네 하나님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기 때문이니

이것은 주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로 하신 말씀을 친히 이루려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너는 깨달을지니 곧 주 네 하나님께서 네게 이 좋은 땅을 소유로 주시는 것은 네 의 때문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뻣뻣한 백성이니라. (신 9:5-6, 흠정역)

 

"오 하나님이시여, 주는 나의 왕이시오니 야곱을 건지도록 명하소서."(시 44:4, 흠정역)

주는 나의 왕이시기 때문에, 교회의 왕께서 나의 왕이시므로, 이 교회(공동체)만이 아니라 이 '나'에게도 구원을 베풀어주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나'를 곤경에 처해 있는 '야곱'으로 칭하고 있습니다. "야곱에게 구원을 베푸소서" 하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야곱(יַעֲקֹב)'발꿈치를 잡은 자, 속이는 자, 대신들어 앉은 자(찬탈자)'이라 함은 '발뒤꿈치를 잡은 자'를 뜻하고,

그렇다는 것은 내가 어둠 속에서 속이는 자인 '사탄'의 종노릇을 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내가 너와 여자 사이에 또 네 씨와 그녀의 씨 사이에 적개심을 두리니 그 씨는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 흠정역)

그리고 주님께서는 죄로 인해 그런 끔찍한 처지에 놓인 '나'를 건져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아니, 주께서 벌써 나의 왕이신데 어째서 야곱이 그렇게 비참한 모습입니까?

내가 이미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는데 어째서 반복적으로 악을 행하며 여전히 죄의 포로가 되어 사탄의 종노릇하는 모습을 보이는 걸까요?

성경에 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이스라엘로 개명해주셨죠. 하지만 그 이후로 야곱은 죽을 때까지 성경에 야곱과 이스라엘로 번갈아가며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식이죠.

"야곱이 이집트 땅에서 십칠 년 동안 살았으므로 이처럼 야곱의 전체 나이가 백사십칠 세더라. 이스라엘이 죽어야 할 때가 가까이 이르매..."(창 47:28-29a, 흠정역)

죄인인 동시에 성도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멀어져 있을 때는 죄인으로, 성령 충만하면 성도로 살게 됩니다. 반쪽짜리 인생입니다.

땅에서 야곱의 마지막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곱이 자기 아들들에게 명령하기를 마친 뒤 발을 침상에 모으고 숨을 거두어 자기 백성에게로 거두어지니라.”(창 49:33, 흠정역)

땅에서는 야곱으로 죽었으나 그래도 하늘에서는 이스라엘로 잘 살고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들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모든 사람이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야곱을 구원해주시면,

“우리가 주를 의지하여 우리 원수들을 누르고 우리를 치려고 일어나는 자들을 주의 이름으로 밟으리이다.”(5, 흠정역)

'우리가'.. 이제 나 야곱은 이스라엘(교회)이 됩니다.

교회(성도)가 우리 주, 우리 왕께 의지하는 이 믿음으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은총(복)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 '이스라엘'(יִשְׂרָאֵל)'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 하나님께서 싸우신다'은, 즉 '성도'(교회)는 이렇게 자신의 믿음을 드러냅니다.

“내가 나의 활을 신뢰하지 아니할 것이요, 나의 칼도 나를 구원하지 못하리이다.”(6, 흠정역)

사람은 늘상 자신의 무기(소유)에 의지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기 힘과 노력으로 해보려고 애를 씁니다. 물질에 의지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로는 내 본질적인 문제인 죄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나를 애워싸고 있는 수많은 죄악들..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합니다. 망한다는 것은 가지고 있던 칼만 없어짐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칼을 가진 사람의 모든 것들이 피해를 입습니다.

예를 들어, 사업이 망하면 그 사업체만 없어지고 마는 것이 아니라 집에 빨간 딱지도 붙고 감옥에 갇히기도 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 봅니다. 어째서 우리 인생이 반쪽짜리인 걸까요?

이미 나는 이스라엘로 개명이 되었는데 도대체 왜 아직도 야곱으로 살고 있습니까? 

나의 죄(원죄)와 죄악들(자범죄들)이 내 원수입니다.

그것들이 나를 이토록 비참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 시를 지은 이름 모를 성도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께서 하셨습니다.”

8절의 '셀라' 이후 나오는 9-22절까지의 깨달음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죄악을 범하지도 않았는데 흉악한 대적들과의 전쟁에서 졌다.

그래서 가진 것을 모두 다 빼앗겨 버렸고, 선민 이스라엘이 양처럼 살해당했고,

포로가 되어 외국으로 끌려갔고, 남겨진 백성들도 비참한 처지가 되었다.

이 모든 일을 다 하나님께서 하셨다.'

성경 말씀은 믿음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자기와 민족의 비참을 하나님의 탓으로 돌리며 원망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 하나님의 무한한 주권을 인정하고 신뢰한 것입니다.

주의 허락 없이는 그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없을 것이고,

그러므로 주님만이 이스라엘(성도)을 구원해주실 수 있을 테니까요.

“그들의 반석이 그들을 팔지 아니하고 주께서 그들을 가두지 아니하셨더라면 어찌 한 사람이 천 명을 뒤쫓으며 두 사람이 만 명을 도망하게 하리요?”(신 32:30, 흠정역)

이스라엘이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파시고 원수에게 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는 거룩한 이름을 얻은 그들이 어째서 주의 다스리심을 거절한 것일까요?

사람이 이유도 모른채 하나님을 멀리하고 죄악에 끌립니다.

쉽게 말하면 사탕 하나를 먹어도 오빠 몰래 숨겼다 먹는 게 좋고, 동생 것을 힘으로 뺏어 먹으면 더 맛있습니다.

가지고 있는데도 더 많이 가지고 싶습니다. 누가 화를 내면 똑같이 화냅니다.

그럴 때는 믿지 않는 사람과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날마다 집니다.

 

“오직 주께서 우리 원수들에게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미워한 자들이 수치를 당하게 하셨나이다.”(7)

오직 주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원수들이 수치를 당하게 하셨기 때문에, 5절과 같이 우리가 주를 의지하여 우리 대적을 누르고 원수들을 주의 이름으로 밟게 됩니다.

5절에서 '주를 의지한다'는 구문에는 히브리어 전치사 (בְּ)/뻬/‘~ 안에 in, ~에 at, ~ 곁에 by, ~와 함께 with’가 쓰였습니다.

그러니까 주를 의지한다는 말의 속뜻은 주 안에서, 주님과 함께, 주님으로 말미암아’서 그런 것입니다.

주님께 의지하는 것마저도 우리가 스스로 주님께 의지하는 것 같으나

실제로는(본질은) 주님께서 함께해주시고, 우리가 주 안에 있으며(사람의 의지로 하나님 안에 있을 수 없음), 다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하나님 앞에서 목이 곧은 백성일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타락한 인류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어느 누구도 자기 의지로 선을 향하는 마음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악행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자기 의를 드러내려 하는 것은 도리어 하나님의 의를 무시하는 죄악이 됩니다.

누구도 나는 죄가 없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의로, 그 특별한 언약적 사랑에 따른 은총으로,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이 무너지고, 그 부서진 마음을 소생시키시고, 자발적으로 선을 향하는 고상한 마음을 가진 새로운 영으로 지으십니다.

자원하는 심령’(시 51:12)으로 재창조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영혼들을 지어가십니다.

그런데 기억해야 할 것은 그렇게 거듭난 신자라 할지라도 그것은 성령 충만한 상태에서만 된다는 사실입니다.

성령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 가운데 놓여있지 않으면 악한 본성을 따라 다시 죄악으로 향하여 가고 마는 것입니다.

죄인이 땅에 살면서도 더이상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늘에서 은혜를 내려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종일토록 하나님을 자랑하며 주의 이름을 영원히 찬양하나이다. 셀라.”(8, 흠정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