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 아무개 2019. 9. 6. 12:27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는 순전한 마음을 드립니다.

시편에서 다윗이 의의 호소를 할 때(1) 그것은 자기가 아무 죄도 없이 완전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러나 진실되게 고백하는 기도는 언제나 우리에게 본이 됩니다.

그는 억울한 현실 가운데서 주님의 공평하신 판정을 기대합니다(2).

왜냐하면 자신은 말로 범죄하지 않기로 마음에 작정하였고(3) 스스로 삼가 남을 해치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4).

물론 이 기도를 드릴 때에 시인은 진심으로 그러했습니다.

사람이 실족하여 범죄하지 않기 위해서는 주님의 말씀을 힘써 따라야 합니다(5).

특히 이 시에서 보여지는 형편처럼 사탄의 시험을 당할 때

우리는 더더욱 성령의 검인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을 확신하며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가 귀합니다. 

하나님이시여(אֵל)/엘/, 제게 응답하시겠으므로 제가 불렀사오니... (6)

 

내 힘으로 돌파할 수 없는 위기가 닥쳐올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정말 하나님의 기적적인 도우심이 간절합니다.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여! (7b)

'오른손'(יָמִין)/야민/은 어떤 일들을 '하기 위해서' 사용됩니다.

우리 주님께서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간섭하시면 모든 위험은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아무리 크고 험한 산도 주님 앞에서는 평지가 될 것입니다. 

주의 기이한 사랑(חֵסֵד)/헤세드/'친절, 인자, 자비, 자애, (애끓는) 사랑'을 나타내소서 (7c)

그런데 어쩌면 그 위험이 거룩하신 주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정말 그럴 땐 어쩌죠?

우리는 기도 중에 소망을 품고, 오직 주님의 뜻을 기다리면서 그 고난을 견딜 것입니다.

성도의 겸손은 날마다 무릎으로 나아가 회개하고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데서 드러납니다.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8a)

여기서 '눈동자'(אִישׁוֹן)/이숀/'눈동자, 작은 사람'라는 히브리어 단어도

시 16편의 설명과 같이 그 눈동자에 맺힌 사람의 작은 형상(모양)이라는 뜻을 분명히 동시에 가지고 있어,

'매우 신경을 써서 보호되어야만 하는 귀중한 어떤 것'을 가리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눈동자와 같습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늘 바라보시고 사랑하시는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를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감추어 주십니다. (8b)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이 땅의 어떤 위험에도 노출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전에도 이미 성령 하나님께서는 여기 이 인간이 반역하는 세계 속에 교회와 함께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자신을 노리는 원수들의 극악함을 토로하는 가운데 자기 영혼과 육신의 구원을 모두 주님께 의뢰합니다. (9-14)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그들이 중시하는 육신의 것을 구하지만..

성도는 주 하나님을 유일한 복으로 알고 주님만을 찾습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번성하나, 성도는 그것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시 49:6-8)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부유함을 자랑하는 자는 아무도 자기의 형제를 구원하지 못하며

그를 위한 속전을 하나님께 바치지도 못할 것은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니라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15)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사람의 육안으로는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주님의 의의 옷을 덧입어 의로운 중에 있게 되었으므로 하늘(낙원)에서 하나님을 뵐 것입니다.

여기서 '만족하리이다'(שָׂבַע)/사바/는 하나님을 보고 아는 만족을 나타냅니다. 

이 밤이 지나 깨어날 때에, 무릎으로 나아가 주님을 뵈올 것이므로 만족합니다.

또한 우리가 죽음의 저편, 낙원에서 깨어날 때에, 주님의 모습을 뵈옵고서 만족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 주께서 다시 오시는 날 우리가 주님과 같은 몸으로 깨어날 때에

우리 주 예수님을 뵈옵고 더더욱 만족하게 될 것입니다.